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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가 '51번' 아닌 '42번' 유니폼을 입고 뛴 까닭은?



이정후가 '51번' 아닌 '42번' 유니폼을 입고 뛴 까닭은?

42번을 달고 타격을 준비하는 이정후. 샌프란시스코 SNS 캡처42번을 달고 타격을 준비하는 이정후. 샌프란시스코 SNS 캡처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자신의 등번호 '51번'이 아닌 '42번'을 달고 뛰었다.

이정후는 16일(한국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전에 1번 타자 중견수로 선발 출전했다. 이날 이정후는 4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경기력을 뽐냈다.

활약을 펼친 이 경기에서 이정후의 유니폼엔 생소한 등번호가 적혀 있었다. 바로 '42번'이었다. 미국 무대로 진출하며 고른 등번호는 51번. 스프링 캠프 시범 경기부터 시즌이 개막한 이후 줄곧 이 번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등번호는 달랐다. 이정후뿐만 아니라 모든 MLB 선수들은 42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했다.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역시 이날 7번이 아닌 42번을 달고 경기를 뛰었다. 

바로 '재키 로빈슨 데이'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MLB 사무국은 매년 4월 15일(현지시각)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해 모든 선수가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뛰도록 한다. 이 번호는 현재 MLB 전 구단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모든 선수단은 경기 전 42초간 묵념을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로빈슨은 유색인으로는 처음으로 빅 리그 경기에 출전해 MLB 내의 인종 장벽을 허문 상징적인 인물이다.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1루수로 첫 출전했고, 선수 생활 내내 인종 차별을 딛고 활약을 이어갔다.

다저스를 내셔널 리그(NL) 6차례 우승, 월드 시리즈 1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1956년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 이후엔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다 1972년 세상을 떠났다.

손괴 후 발만 남은 로빈슨의 동상. 연합뉴스손괴 후 발만 남은 로빈슨의 동상. 연합뉴스
다만 올해 1월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 캔자스주의 한 공원에 세워져 있던 로빈슨의 동상이 불에 탄 상태로 발만 남겨진 채 도난당한 것. 당시 동상 손괴로 인한 피해액은 약 7만 5천 달러로 추산됐다.

이에 MLB 사무국과 30개 구단은 동상을 세웠던 재단 '리그 42'를 통해 로빈슨의 대체 동상 재건 자금과 리그 42 운영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 밖에도 재단에는 30만 달러가 넘는 기부금이 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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