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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서' 제주4‧3 아픔 어루만진 판사, 마지막 말은



제주

    '법 앞에서' 제주4‧3 아픔 어루만진 판사, 마지막 말은

    [인터뷰]제주4‧3전담재판부 장찬수 부장판사
    3년간 수형인 1천여 명 재심 통해 무죄 선고 소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반재판도 직권재심 명시 등 4‧3특별법 보완 필요"
    "재심, 수많은 노력의 결실…앞으로도 연대 잊지 말길"

    장찬수 부장판사. 고상현 기자장찬수 부장판사. 고상현 기자
    "이제 곧 봄철 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바람은 유채꽃을 흔들 것 아닌가요. 부디 '어떻게 해서 같은 일 하면서 제각각인가'라는 말 듣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모두를 위하여 혼디 모영 고치 가보게(함께 모여서 같이 갑시다). 여러분 폭삭 속았수다(무척 수고하셨습니다)."
     
    제주지방법원 4‧3전담재판부 첫 재판장인 장찬수(54) 부장판사의 말이다. 오는 20일 광주지방법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장 부장판사는 7일 기자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4‧3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제주어로 이렇게 답변했다.
     
    장 부장판사는 이 발언에 대해 "4‧3수형인 재심이 이뤄지기까지 수십 년 동안 (유가족, 4‧3단체, 도민사회, 언론 등) 많은 노력이 있었다. 수형인 재심은 그 노력의 결실이다. (4‧3 해결을 위해)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 연대 정신을 잊지 말고 나아가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 2020년 2월 제주법원 제2형사부에 부임한 장 부장판사는 도내 주요 강력사건 재판을 맡으면서도 4‧3수형인 재심을 통해 유족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2021년 3월 16일 한날에 4‧3수형인 335명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70여 년 통한의 세월을 견뎌온 유족 한 명 한 명에게 위로를 건넸다.
     

    이날 재판은 시인인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의 '법 앞에서'라는 시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허 소장은 4‧3 당시 불법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행방불명 돼 여태껏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형인이 70여 년 만에 비로소 '법 앞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을 노래했다.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안 보이던, / 사람씨 풀씨마저 안 보이던 시절 / 죄 없이 죄가 된, 법 아닌 법 앞의 사람들 / 모욕도 수치도 속수무책 법 아닌 법 앞에서 / 눈도 입도 다물던 사람들, 이제 한번 / 묻습니다 법 앞에서 / 거기 꽃 피었습니까 / 여기 꽃 피젠(피우려) 헴수다(합니다).'
     
    4·3 재심 재판 모습. 고상현 기자4·3 재심 재판 모습. 고상현 기자장 부장판사는 지난 2021년 4‧3수형인 특별재심과 직권재심 조항이 담긴 4.3특별법 개정안 시행 이후 제주법원에 신설된 4‧3전담재판부의 첫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4‧3 일반재판과 군사재판 수형인 4092명 중 1191명(29%)이 장 부장판사를 통해 70여 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재판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그는 "재심 절차는 서로 다른 이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절차가 아니다. 법대로 판단하는 절차다. 하지만 4‧3 자체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에 이념 대립이라는 문제까지 겹쳐 이를 극복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장 부장판사는 4‧3특별법 개정안에 나온 재심 조항 중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언급했다. 군사재판 수형인 직권재심과 일반재판 수형인 특별재심 과정에서 문제점이 노출됐다는 것이다.
     
    "희생자 결정을 받지 못한 분들에 관한 재심 절차에 있어서 조금은 모호한 규정으로 불필요한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한 보완이 필요하다. 일반재판 수형인은 아직도 직권재심 규정이 명시적으로 도입돼 있지 않다. 이 부분도 명시적인 입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간 4‧3재심을 맡은 소회에 대해선 "4‧3수형인이 3천 명 이상 남은 상황에서 그 업무를 더는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간의 재판을 바탕으로 후임 재판장께서 더 잘 이끌어나가실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장찬수 부장판사 기자 간담회 모습. 고상현 기자장찬수 부장판사 기자 간담회 모습. 고상현 기자
    다음은 장찬수 부장판사와의 일문일답.

    △2020년 2월 제주 부임 이후 3년간 4‧3재심을 맡았다. 그 소회는?
     
    4·3 재심 업무를 맡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스로 4·3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도 부족한 상태였기에 부임 후 300명이 넘는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재심 청구서가 접수됐을 땐 너무 막막했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법정에서 직접 가슴 아픈 사연들을 접하면서 재판의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부 4·3진상조사보고서를 비롯해 '4·3, 그 진실을 찾아서', '4·3은 말한다' 등 책을 많이 읽었다. 소설 순이삼촌과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등 예술작품들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군사재판 수형인과 일반재판 수형인까지 재판받을 분이 3천명 이상 남은 상황에서 그 업무를 더는 수행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재판의 성과를 바탕으로 후임 재판장이 더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3년간 4·3재심 업무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4‧3 재심 사건을 다루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지난 2021년 3월 16일 하루에 이뤄졌던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본안 재판이 아닐까 한다. 하루에 20건의 사건, 300명이 넘는 피고인들에 관한 재심사건을 20분 단위로 본안 기일을 나누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서 재판한 날이다. 사건 규모뿐 아니라 그 많은 사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서 법적으로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외에도 유족, 간혹 기적적으로 생존한 수형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순간순간이 모두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난 2021년 3월 16일 무죄 선고 직후 4·3수형인 유족 기자회견 모습. 고상현 기자지난 2021년 3월 16일 무죄 선고 직후 4·3수형인 유족 기자회견 모습. 고상현 기자△4‧3 재심 사건을 맡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우선 과거 재판 기록이 온전히 보전돼 있지 않아 재심 절차에서 문제 되는 세세한 쟁점에 관해 판단하기가 어려웠는데, 그 일례가 전임 재판부에서 했던 공소기각 판결과 달리 무죄 판결을 선고할 때였다. 결론을 내릴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또한 재심은 이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절차가 아니다. 재심 절차는 오로지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재심 사유가 있는지, 혹은 4·3특별법 취지대로 희생자 결정이 이뤄지면 재심 개시 결정을 해야 하는지 법대로 판단하는 절차다. 이념의 관점에서 4·3을 바라보려는 시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법대로만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4·3특별법 재심 관련 조항 중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4·3특별법 전부개정을 통해 군사재판에 관한 직권재심 및 희생자 결정을 받은 분들에 관한 특별재심 등을 도입해서 진실 규명과 희생자·유족 명예회복에 큰 진전을 이뤘다. 다만 재심 관할권이 제주지법에 있다고 하는데, 희생자 결정을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규정이 모호해 불필요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서 보완이 필요하다. 4·3은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며, 당시 재판 인력 부족으로 일부 수형인은 육지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타 지역 법원은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법 취지에 따라 4·3 재심은 제주에서 하는 것이 맞다. 또한 일반재판 수형인에 관해서는 아직도 직권재심에 관한 규정이 도입돼있지 않아 이 부분도 명시적 입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일반재판과 군사재판을 따지지 않고 직권재심과 청구재심에 관한 관계 설정을 위한 조문을 도입하는 것이다. 직권재심은 청구재심을 막는 취지가 아니라 희생자와 유족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국가의 의무로 도입한 절차다. 따라서 희생자와 유족은 재심절차에 있어 국가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데, 이는 직권재심에 있어 명확한 권리구제의 기준과 그 절차의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기준과 절차에 대해 희생자나 유족에게 자유롭게 그 정보를 열람하고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나아가서는 유족이 없어서 희생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수형인에 관한 직권재심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기준과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
     
    4·3수형인 재심 재판 모습. 고상현 기자4·3수형인 재심 재판 모습. 고상현 기자△4‧3희생자와 유족, 관련 단체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주에서 3년 살면서도 제주말에는 능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제주말로 해보겠다. 제주에 와서 '동네마다 곹은 날 식게칩이 하다(제삿집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어둑곡(어둡고) 밝은 날도 있었고, 가심 아픈 것도 용서헤사 시처진다(가슴 아픈 것도 용서해야 씻어진다)는 말로 오랜 세월을 살아낸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 혼디 모영 고치 가보게(함께 모여 같이 가봅시다)라는 말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 폭삭 속았수다(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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