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기억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과연 우리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빌러비드'(1987)는 미국 노예제의 역사를 소재로, 감히 기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코 잊을 수도 없는 뼈아픈 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마거릿 가너 사건'이 소설의 모티프다. 1856년 1월,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소설 속 주인공 세서처럼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그녀의 삼촌이자 노예 출신인 조 카이트의 집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에게 붙잡힐 위기의 순간,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벤다.
소설은 그러나 노예제 또는 인종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다. 백인들의 야만적 행위를 고발하고 자유를 향한 흑인 노예의 처절한 몸짓을 그림으로써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 작품의 의도는 아니다.
소설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말하고 감히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지, 그 불가능한 방법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다. 차마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재기억과 망각을 통해 실현됨도 보여준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단지 '흑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로만 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빌러비드' 역시 노예제란 비정한 제도 때문에 누구보다 사랑했던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던 흑인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고집 세게 우리의 곁으로 돌아와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달래줄 것을 요구하는 모든 죽은 자들의 이야기, 기억 저편으로 내쫓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현재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과거, 그래서 번번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뼈아픈 인간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옮김이·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최인자 초빙교수)
토니 모리슨은 데뷔작 '가장 푸른 눈'에서부터 '술라' '솔로몬의 노래' '자비'와 최근작인 '고향'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흑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경험을 기록하고 문학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흑인문제를 다루는 그녀의 방식은 백인 가해자를 고발하고 참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의 주체적 관심을 되찾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모색하는 것이다.
소설 제목 '빌러비드'(Beloved)는 '사랑받는 자'의 뜻으로, 주인공이 죽은 딸의 묘비에 새겨준 글자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을 애도하는 작가의 뜻이 담겼다.
"나는 이것이 출몰하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과거가 되길 바랐습니다. 과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과거 말이죠. 기억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해나가기 전까지는."(토니 모리슨 '뉴욕타임스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