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8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총리실 제공미국이 관세협상에 나선 한국에 미국채 매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중 관세전쟁이 본격화한 이후 매도가 터지며 금리가 급등해 '미국채=안전자산'이라는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다음주 미국에서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을 만나 통상 현안 회의를 할 예정이다.
앞서 베센트 장관은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다음주 한국과의 협상이 있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도 한국이 영국, 호주, 인도, 일본 등과 우선협상 대상국이라고 전했다.
한미 관세협상의 막이 오른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요구할 조건이 무엇일지 관심이 쏠린다. 시장은 '미국채 매입' 요구 가능성에 주목한다.
원유와 반도체 장비, LPG(액화석유가스) 등 미국산 수입 상위 10위 품목은 이미 시장 점유율 30~85%로 이미 1~2위를 차지하고 있어 추가로 수입을 늘릴 여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한국이 보유한 미국채 보유량은 1250억달러로 전체 발행잔액의 0.4%에 불과하다. 1위 일본(1조 1천억달러)과 2위 중국(7600억달러)과 비교해 크게 낮은 규모다.
또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4096억 6천만달러로 전 세계 9위 규모로 크고,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도 70% 수준으로 높아 60%를 넘지 않는 전 세계 평균을 상회한다.
트럼프 대통령 관세 정책의 목표가 '쌍둥이 적자(무역적자+재정적자)' 해소를 위한 것이란 측면에서도 미국채 매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24조달러(약 3경 4300조원) 규모의 미국채 평균 만기는 65개월(약 5.4년)로 짧은 편이고 순정부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100%를 초과한다. 또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0%대 기준금리가 현재 4.5%로 늘어나 미국 정부의 이자부담은 물론 미국채의 신뢰성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메리츠증권 윤여삼 연구원은 "금융시장이 불안했던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 신용등급 강등, 코로나19 팬데믹 등 과정에서 미국채는 안전자산으로 도피처 역할을 수행했다"면서 "단기적으로 급격한 유동성 충격에 미국채 금리가 일시적으로 오르는 구간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미국채의 위상과 신뢰성을 강하게 거론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채를 보유한 외국인 비중도 2008년 55.6%를 정점으로 현재 30.3%로 급감했다.
한화투자증권 김수연 연구원은 "우선 협상 대상국에 이름을 올린 국가는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여주거나 무역적자를 갈음할만한 카드가 필요하다"면서 "미국에 사줄 수 있는 건 무역 상품이 아니라 국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김 연구원은 이어 "기축통화로써 달러 고평가가 미국의 제조업을 약화시키고 무역수지를 구조적으로 만들었다"면서 "무역국에 미국채를 부담하게 해 금리를 낮추면 재정부담도 해소하고 달러를 약세로 만들어 무역적자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의 토대를 만들어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이 지난해 11월 낸 보고서도 미국채 매수 요구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이른바 '미란 보고서'에는 미국의 달러가 기축통화로 인한 실수요와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강세가 오랫동안 지속됐고, 이 때문에 미국의 무역적자가 발생해 제조업 기반과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따라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해 제조업 문제를 해결하고, 달러화 강세에도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수단으로 '관세'와 '금융'을 꼽았다.
즉 높은 관세로 무역적자를 줄이고 협상의 도구로 사용한다. 또 무역국에 초장기물 국채를 매입하도록 압박하고, 달러화로 외환보유고를 축적하면 수수료를 부과하며, 상대국의 통화를 강세로 유도할 것을 요구한다는 전략이다.
다만 금융적 수단은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만큼, 먼저 관세로 압박해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전략을 거부할 경우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KB증권 권희진 연구원은 "현재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대체로 미란 보고서 내용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미국이 한국에 미국산 상품을 더 수입하거나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할 수 있지만, 미란 보고서처럼 미국이 대대적인 글로벌 시스템 재편을 염두하고 있다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권 연구원은 "한국은 외환보유액 규모도 크고 그 중 달러화 비중도 높아 단기 미국채를 매도하는 대신 100년 만기 또는 영구채와 같은 초장기 미국채를 매입하거나 달러 대비 원화의 강세를 유도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나아가 관세 철퇴를 맞거나 안보 우산에서 제외되고 싶지 않으면 대중국 관세를 높이라는 요구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