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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덧없는 봄날, 이윤기와 소세키가 조용히 건네는 말[책볼래]

'봄날은 간다'와 '풀베개'…말보다 시선의 문학

번역가 겸 작가 이윤기, 일본 근대문학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번역가 겸 작가 이윤기, 일본 근대문학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
봄을 배경으로 쓰인 문학작품은 흔하다. 하지만 봄이라는 계절의 표층적 이미지를 넘어, 삶의 구조와 정서, 존재의 태도를 사유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이윤기(1947~2010)의 단편소설 '봄날은 간다'(섬앤섬)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풀베개'(지워크)는 각기 다른 시공간의 언어로, 그러나 닮은 결을 지닌 사유로, 그런 봄의 내면을 관조한다.

'봄날은 간다'는 번역가이자 작가 이윤기가 생의 후반기 양평의 시골 집에서 나무를 심으며 보낸 시간을 담은 산문적 소설이다. 이 책은 단순한 귀촌일기나 자연예찬이 아니라 생의 덧없음과 고요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태도를 보여준다.

봄날 흙을 뒤집고 묘목을 세우며 그는 스스로 말없이 다짐한다. 피어나는 일보다 지는 일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시작과 열망 대신 수용과 이별을 배워가는 계절, 그 늦봄의 정서가 책 전체를 관통한다.

반면 '풀베개'는 젊은 화가가 온천 마을을 유랑하며 자연과 사람, 예술을 관조하는 이야기다. 이야기에는 사건이 거의 없고, 갈등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이 정적의 흐름 속에 감정과 이미지, 사유의 결을 치밀하게 깔아놓는다.

특히 최신 번역본(지워크)은 원문의 고전적인 리듬과 절제된 문장을 충실히 살려 독자로 하여금 문장과 여백을 천천히 음미하게 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감정을 덜어내고 아름다움을 붙잡는 태도는 동양 회화와도 닮아 있다.

섬앤섬·지워크 제공 섬앤섬·지워크 제공 
두 작품 모두 자연 속에서 시간을 살고,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한다. '봄날은 간다'의 화자는 노년의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말하지 않지만 느끼고 일상을 기록하며 '생을 견디는 힘'을 정리해간다.

반면 '풀베개'의 화자는 감정에 거리 두며 예술을 위한 관조와 침묵을 실천한다. 삶을 해석하기보다 바라보고 통제하기보다 흘러가게 두는 두 화자의 태도는 시대는 다르지만 문학 안에서 조용히 조우한다.

문체 역시 닮아 있다. '봄날은 간다'는 단정하고 간결한 산문으로 삶의 이면을 다루고, '풀베개'는 운율과 이미지가 살아 있는 절제된 언어로 감각을 담는다.

이윤기의 문장은 따뜻하고 무심하며, 소세키의 문장은 냉정하지만 미세하게 진동한다. 두 문장 모두 독자를 재촉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으며 그 대신 더 멀리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의 우리가 마주한 봄은 이전과 다르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 기후위기, 반복되는 상실, 정치·사회적 불안 속에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압박이 우리를 휘감는다. 그런 시대에 계절은 그저 희망이나 설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두 작품은 조용한 문장으로 말을 건넨다.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 '덜 말하고 더 바라보자'고. 그리고 '피는 것도 좋지만, 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도 있다'고.

계절은 되돌아오지만 우리의 삶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봄, 말 없는 두 문장을 곁에 두어도 좋겠다. '봄날은 간다'와 '풀베개'는 그런 계절에 읽히는, 시간과 감정의 깊이를 다듬어주는 작품이다.

■봄날은 간다: 신화 속으로 떠난 이윤기를 그리며
이윤기 외 지음 | 섬앤섬 | 276쪽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지음 | 오현수 옮김 | 지워크 |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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