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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운동 그만두겠습니다."
임수정(27)은 지난해 여름 소속 매니지먼트사에 은퇴의사를 표명했다. 일명 ''일본 사건'' 이후였다. 그는 그해 7월 일본 민방 TBS의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일본 남자 개그맨 3명과 불공정한 격투 끝에 전치 8주 부상을 당하며 구설에 올랐다. 연일 ''일본 사건''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포털에서 ''임수정''을 치면 ''집단린치'', ''구타논란'' 등 자극적인 단어가 연관검색어로 떴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격투기 선수 임수정''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임수정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격투기를 떠나있는 동안 학업(용인대 격기지도학과)과 크로스핏(CrossFit) 코치 생활을 병행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가까운 지인들만 만났어요. 그런 분들 만나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안정됐거든요. 음식점 같은 곳에서 모르는 분들이 ''임수정 씨 아니세요?'' 알은 척해도 아니라고 했죠. 정말 가고 싶은 격투기행사가 있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물어볼까봐 못갔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렇게 피해야 되나'' 싶기고 하고…."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던 임수정은 지인들의 설득과 주변의 배려 덕에 다시 링 위에 섰다. 그리고 지난달 1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입식격투기대회 ''더 칸3''에서 신예 파이터 미쿠 하야시(28, 일본)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지난 악몽을 떨쳐냈다.
이번 시합 출전을 결심하기까지 망설임이 많았다. 상대는 일본 선수. 이제야 좀 잠잠해진 ''일본 사건''이 또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봐 겁났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더라구요. ''어차피 선수는 링에서 보여줘야 한다. 시합에만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스렸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움츠러드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운동인데, 선수생활을 이렇게 끝내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시합을 뛸 용기를 냈죠."
승리가 확정된 후 임수정은 눈물을 쏟아냈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어요. 다시 이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구요." 시합 전 부담감이 컸다. ''일본 사건'' 이후 첫 시합이었고, 한국에서 3년 만에 치르는 경기였다. 불안한 마음도 많았다. 그가 상대보다 나은 건 힘과 체력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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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핏으로 체력훈련은 꾸준히 했지만 타격훈련이 부족했죠. ''일본 사건'' 이후 타격훈련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경기감각도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구요. 특히 신예선수는 성장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몇 개월 전 경기영상 보고 분석했을 때와는 또 다른 움직임이 나오거든요."
체중조절도 실패했다. 임수정은 계약체중(54kg)에서 1.8kg을 초과해 2점 감점을 받고 경기에 나섰다. 처음 시도한 ''수분 다이어트''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페널티를 받게 되어 불안했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었어요. 상대를 압도하지 않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KO로 가자''고 마음 먹고 과감하게 경기했던 거 같아요. 미쿠한테도 고마웠어요. 방어적으로 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와줘서 활발한 타격전이 전개됐죠."[BestNocut_R]
뼈저린 반성도 이어졌다. "계체통과는 선수의 기본이잖아요. 어찌 보면 자격 상실이죠. 저희 코치님은 ''내가 미쿠 코치였으면 시합 안붙였다''고 펄펄 뛰셨어요. 경기 끝난다음 상대 측에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너무 죄송스럽죠."
어느덧 격투기 선수생활 9년차 베테랑. 악조건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달려온 덕에 임수정은 한국 여성 격투기의 상징같은 존재가 됐다.
"저의 영원한 스승이신 이기섭 관장님은 제가 마음이 너무 여려서 선수재목은 아니라고 보셨대요. 하지만 맞는 법부터 배워가며 한계를 극복했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멘탈도 강해졌어요. 3년 전에는 시합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적 있는데 끝까지 참고 뛰었어요. 코 수술 하고 인상이 사나워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좀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알고 보면 제가 여리거든요."
임수정의 마음은 벌써 다음 시합에 가 있다. "이번 시합 전에는 우왕좌왕했어요.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더 멋진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선수로서 기쁘게 은퇴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