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공지능(AI)을 단순 행정 보조 수단이 아닌 예산심의와 제품안전, 전략산업 데이터 구축 등 민감한 정책 영역에까지 본격 투입하기 시작했다.
AI가 국가 예산 배분과 국민 안전, 산업 현장의 핵심 데이터까지 다루기 시작하면서 보안 우려와 함께 국산 AI 모델·반도체·컴퓨팅 인프라 확보 필요성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예산심의에 특화 AI…유사·중복 사업 검토
14일 정부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오는 15일까지 세종시에서 2027년 국가연구개발(R&D) 예산을 다루는 예산설명회를 연다. 과기부는 이번 설명회부터 국가 R&D 예산심의를 지원하는 특화 AI 서비스를 실제로 처음 도입·활용할 예정이다.
해당 AI 서비스는 32개 부처·청의 내년도 R&D 사업 간 유사·중복 여부를 검토하고 심의자료 작성 부담도 덜어줄 예정이다.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 배분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 AI를 활용하는 셈이다.
박인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낭비 요인은 철저히 차단하고 꼭 필요한 분야에는 과감히 투자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신속히 확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예산심의뿐 아니라 내부 행정 업무에도 AI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과기부는 전날 AI 기반 지능형 업무 환경 조성을 위한 'AI 기반 특화 행정 서비스 구축(AI-NEXT)'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까지 기반 구축과 시범 서비스 적용을 마친 뒤 단계적으로 고도화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이번 사업은 부처 내에 분산된 문서와 데이터를 통합·자산화하고, 검색증강생성(RAG) 기술을 적용해 AI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실효성 있는 데이터 검색·활용 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다.
제품안전도 AI 감시…해외직구 위해제품 차단
스마트이미지 제공AI는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제품안전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다.
산업통상부 등 12개 부·처·청은 지난 12일 제6차 제품안전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제품안전 전(全)주기 관리에 데이터와 AI를 도입하기로 했다. 정부는 제품사고 정보를 자동 수집·분석하고 온라인 유통시장을 상시 감시해 위해제품 유통을 차단한다는 계획이다.
산업부는 해외직구와 온라인 유통 확산, AI·융복합 신제품 증가 등을 AI 활용 확대 배경으로 보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한국소비자원·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직구 제품의 안전기준 부적합률은 13.2%로 국내 유통 제품 부적합률 5.1%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정부는 해외직구 위해제품의 국내 유입을 막기 위해 안전성 조사를 지난해 1천 건에서 2028년까지 2천 건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제품사고 정보 수집·분석 과정에는 AI를 도입하고, 온라인 유통시장을 AI 기반으로 상시 모니터링해 위해제품 유통을 차단할 방침이다.
김대자 국가기술표준원장은 "제품안전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본 가치로, 기술혁신과 유통환경 변화 속에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데이터와 AI를 활용한 선제 관리로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기업과 시장의 신뢰도 함께 높이겠다"고 밝혔다.
김용수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은 "제품안전은 특정 부처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로 부처 간 협력과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자율운항선박도 데이터로…전략산업 AI 기반 구축
산업부는 해양수산부와 함께 전략산업 분야에서도 AI 데이터 기반 구축에 나서고 있다. 두 부처는 지난 7일 서울 LW컨벤션센터에서 '자율운항선박 AI 데이터플랫폼 사업' 출범식을 열었다.
자율운항선박은 AI가 센서와 항해장비, 기관설비 등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학습해 운항을 판단하는 선박이다. 정부는 충돌 회피와 항로 최적화, 고장 예측 등에 필요한 실제 해상 운항 데이터를 수집·표준화하기로 했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는 자율운항시스템, 항해·조종, 엔진·기관, 원격관제·디지털트윈, 통신·데이터, 해상교통, 기상, 안전·보안 등 8개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100여종의 데이터를 수집한다.
박동일 산업부 산업정책실장은 "K-조선이 앞으로 만들어낼 자율운항선박의 경쟁력은 결국 양질의 데이터에서 결정된다"며 "각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를 적극 공유하고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은행을 만들자"고 말했다.
김혜정 해수부 해운물류국장도 "축적하게 되는 운항 데이터는 국제표준 대응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감 데이터 다루는 AI…국산 모델·반도체 필요성 부각
이처럼 AI가 예산심의와 제품안전, 자율운항선박 같은 민감 행정·전략산업 영역까지 들어오면서 AI 운용에 필요한 모델과 반도체, 컴퓨팅 인프라를 국산화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행정 데이터와 산업 기밀을 외산 모델과 해외 인프라에 의존할 경우 보안과 산업안보 문제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외산 AI 모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독자 모델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과기부는 국내 기술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확보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말하는 독자 모델은 해외 모델을 단순 조정한 수준이 아니라 국내에서 직접 설계하고 처음부터 학습시킨 모델을 뜻한다.
국가 AI컴퓨팅 센터 구축도 속도를 내고 있다. 과기부는 지난 11일 삼성SDS 컨소시엄을 민간참여자로 최종 확정하고, 올해 2분기 안에 민·관 합작 특수목적법인을 세운 뒤 3분기 중 센터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다.
정부는 추가 자금 조달을 거쳐 총 2조5천억원 규모로 센터를 구축하고, 2028년까지 첨단 AI반도체 1만5천장 규모의 인프라를 확보한다는 목표다. 이 센터는 국산 AI반도체의 개발·검증과 실제 상용 서비스 적용을 지원하는 초기 수요처 역할도 맡게 된다.
국산 온디바이스 AI반도체 상용화도 정부가 공을 들이는 분야다. 과기부는 지난 12일 포스코DX와 딥엑스를 찾아 제조·물류·매장관리 현장에서 국산 AI반도체 활용 상황을 점검했다.
온디바이스 AI반도체는 개별 기기에 탑재돼 데이터를 직접 처리하는 반도체로, 서버형 AI반도체보다 지연시간과 전력소모를 줄이고 보안성을 높일 수 있다.
이도규 과기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이제 곧 본격 성장할 피지컬 AI와 에이전틱 AI 시대에서 국산 AI반도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