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이하 코로나19) 지역사회 감염이 확산된 2월 중순. 자고 일어나면 한국인 입국금지 국가들이 늘어났다. 지난해 겨울부터 친구와 계획한 3월 말 필리핀 팔라완 자유여행에도 비상이 걸렸다.
어차피 위약금을 물 바에야 결항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는데 갈수록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했다. 설상가상, 회사에서도 불필요한 해외여행 자제 지침이 내려왔다.
여행까지 남은 기간은 딱 한 달. 패키지 여행은 한 번에 취소라도 된다지만, 자유여행인 탓에 국제선·국내선·숙박 예약까지 전부 구매처가 달랐다. 이미 무료 취소 기한을 넘겨 환불 가능한 예약이 없어서 더 막막했다.
지난달 26일 필리핀 정부는 한국의 대구·경북 지역 거주자나 방문자에 대해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대구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된 것을 의식한 조치였다. 이제 정말 자발적으로 환불을 요청할 시점이었다.
일단 코로나19가 예측 불가능한 재난상황이라는 점, 나와 친구가 경북 지역을 방문할 일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각 숙박·항공 예약대행사에 접촉했다.
최종적으로 우리의 여행은 200만 원 전액이 환불됐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국제 상황은 수시로 변했고, 여행자 개인 대 여행 업체 사이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3주 간 이어진 코로나19 여행 취소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투숙 예정이었던 리조트의 폐쇄 공지. (사진=리조트 홈페이지 캡처)
◇ 국내 대행사 마이리얼트립: 실수가 낳은 '무료 취소'제일 먼저 예약한 것도 국제선 항공권이니 취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느 대행사나 고객 상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마이리얼트립은 대기 세번 만에 전화 연결이 끊어졌다. 그래서 차선책인 일대일 대화 상담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선 항공권 취소 요청에 대한 첫 답변은 5시간 만에 왔다. 대화창에서 '뒤로 가기'를 하면 모든 상담 내용이 삭제되기 때문에 '감옥'처럼 나올 수 없었다. 예약 내역은 컴퓨터로 보면서 상담원과는 휴대폰으로 대화했다.
결정적 문제는 그 다음 상담에서 발생했다. 아직 무료 취소 여부를 알 수 없었는데 상담원이 "노쇼 수수료 발생이 우려된다"며 항공권을 임의대로 취소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료 취소가 안되면 무조건 취소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대응은 무책임하게 흘러갔다. 상담원은 "추후 결정하겠다"는 우리 요청을 잘못 읽어서 취소했다며 항공사 결정을 기다리자는 말만 반복했다. "만약 수수료를 물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대응책을 말해달라"는 질문에도 답은 동일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직원과 따져묻는 고객 간의 논쟁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이날 우리는 처음으로 마이리얼트립 측과 전화로 소통할 수 있었다. 전화를 건 관계자가 업체 과실과 책임을 인정해 국제선 항공권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액 환불이 이뤄졌다.
◇ 글로벌 대행사 아고다: 숙박 업소와의 '딜'이 관건'코로나19' 패닉 사태에서 그나마 소통이 가장 원활했던 건 아고다였다. '글로벌' 타이틀을 가진 숙박·항공 예약대행사다웠다. 물론, 전화 연결까지는 1시간 남짓이 걸렸지만 그 후 응대 메뉴얼이 일관적이고 이전 상담내역까지 잘 공유돼 혼선이 없었다.
우리는 총 세곳의 숙박을 아고다에서 예약했다. 5성급 고급 리조트, 3성급 리조트, 마지막으로 시내 호텔이었다.
아고다를 통해 사정을 이야기하자 리조트들에서는 별다른 증빙자료 없이도 무료 취소를 결정했다. 3성급 리조트에서는 '한국·중국 고객들은 그냥 취소해주고 있다'는 지침을 전해왔다.
그러나 시내 호텔은 완고했다. 어떤 증빙이 있어도, 필리핀 당국 규정 때문에 입국을 못하는 상황이라도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아고다에서는 호텔 측 의사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우리는 영어로 호텔 측에 직접 문의를 넣었다.
여기에는 조금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무료 취소 가능하다. 단, 방이 팔리면".
긴 기다림 끝에 지난 16일 우리가 예약했던 방이 판매돼 시내 호텔까지 환불을 모두 마쳤다. 필리핀 당국이 주요 관광지인 세부와 보홀에 외국인 입국을 금지한 날이었다.
(사진=유원정 기자/자료사진)
◇ 중국 업체 트립닷컴: 규정만 있고 고객은 없다가장 적은 액수였던 필리핀 국내선 항공권은 그야말로 '전투'를 방불케 했다.
트립닷컴은 글로벌 규모이지만 중국 자본과 약관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여행 예약 대행사이다. 세 곳 중 가장 전화 연결이 원활한 동시에 '규정'만을 강조하는 고객 응대로 소통이 가로막혔다.
처음 취소 요청을 넣었을 때 우리가 들은 답변은 "우리 쪽엔 취소 규정이 없다. 직접 외항사에 전화해 취소 규정과 필요 자료, 외항사 상담직원의 이름을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다만 트립닷컴이 요구한 사실은 비밀에 부치고.
마치 스파이 작전과도 같은 지시를 따랐으나 당연히 외항사 측에서는 "취소하려면 고객 개인이 아니라 여행 대행사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어쩔 수 없이 트립닷컴 쪽에 "규정과 필요자료를 알아봐달라"고 재요청했지만 "우리까지 내려온 취소 규정이 없다"는 말만 반복됐다. 방법이 없었던 우리는 일단 대다수 항공사들이 인정하는 증빙자료를 트립닷컴 측으로 넘겼다.
일주일 뒤 메일로 위약금 면제 취소가 불가하다는 알림이 왔다. 거기에는 외항사 측의 거절 사유도, 보충해야 하는 증빙자료 내역도 없었다.
당시에는 이미 상황이 달라져 필리핀 정부는 우리가 도착할 루손섬 전체로 봉쇄를 확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트립닷컴이 그토록 '없다'던 코로나19 관련 환불 규정을 외항사 글로벌 홈페이지에서 찾은 참이었다.
그래도 트립닷컴의 대응은 여전했다. '규정'을 찾아오자 이번에는 "명시된 증빙자료가 없다"는 반박을 펼쳤다. 외항사의 거절 사유, 필요한 증빙자료 내역 등은 알려줄 수 없고, '직접' 문의하라는 처음 단계로 돌아갔다.
일은 또 뜻밖의 지점에서 풀렸다. 17일 필리핀 당국이 루손섬과 연결된 모든 육·해·공 교통편의 중단을 결정하면서 우리 비행편까지 결항됐다.
더욱 놀라운 점은 비행편의 도착지가 아무도 모르게 마닐라로 변경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행사인 트립닷컴도 이를 파악하지 못해 사라진 비행편이 그대로 항공권에 남아있었다. 만약 여행을 갔다면 봉쇄된 마닐라에서 '국제미아'가 될 뻔했으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트립닷컴과 외항사, 양측의 떠넘기기 사이에서 표류하던 우리는 결국 필리핀 당국의 봉쇄 정책에 따른 결항으로 항공권을 전액 환불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