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이태원' (사진=KT&G 상상마당 제공)
강유가람 감독의 카메라는 본인과 가족이 살았던 서울 강남구 은마아파트('모래')와, 한때 가장 힙한 동네로 꼽혔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진주머리방')을 향했다. 또한 국정농단 사태 때 다양한 결의 목소리를 냈던 페미니스트들('시국페미')과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활발히 활동한 영페미들('우리는 매일매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난 5일 개봉한 '이태원'은 공간과 여성이라는, 강유가람 감독이 꾸준히 기록했던 주제가 겹친 작품이다. 삼숙, 나키, 영화라는 세 여성을 통해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였던 지난 25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이태원' 인디 토크가 열렸다. 최근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독 저서를 낸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씨가 사회를 본 이 행사에서 강유가람 감독은 '이태원'이라는 작품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2014년부터 촬영을 시작하며 그는 거품을 봤다. 강유가람 감독은 "지금은 경리단길 버블이 수그러드는 과정에 있지만, 그때는 엄청났다. 월세도 비싼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들어왔고 우사단로도 그랬다. 촬영하면서부터 이 상황이 되게 명확하게 보이기도 했고, 이런 흐름(젠트리피케이션)이 사람들을 머물지 못하게 한다고 느꼈다. 폴리 캐틀이 갑자기 50억 원에 팔리는 게 마음에 남아 그걸 축으로 삼아 촬영했다"라고 밝혔다.
'이태원'은 '그랜드올아프리'라는 클럽을 40년 동안 운영한 삼숙,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나키, 어릴 적부터 이태원을 들락날락했던 영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키는 '이태원' 기획 초기 당시 꽤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강유가람 감독은 "나키 님 만났더니 스타일도 되게 강렬하고 이야기가 되게 많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키 님만 쫓아다녔다. 제작 지원받으려고 기획서 쓸 때 제목은 '럭키 나키'였다. '나키'(라는 이름)가 럭키(lucky)에서 왔다고 해서"라고 설명했다.
강유가람 감독의 친구가 여성 지원 단체에서 활동하며 나키와 인연이 있었다. 친구 소개로 만난 나키는 강유가람 감독에게 만날 사람이 있다며 이태원의 터줏대감 같은 삼숙을 직접 연결해 주었다. 영화도 나키를 만나게 해 준 친구 소개로 만났다.
'이태원'에서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삼숙이다. 강유가람 감독은 "확실히 삼숙의 비중이 크고 나머지 인물은 (비중이) 작은데, 제가 생각할 땐 어떤 서사를 더 드러낼 수 있는가도 자신이 가진 자산과 사회적인 지위와도 연결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삼숙 님은 저에게 뭐랄까 '준비된 화자'였다. 맨 처음에 달그락달그락하고 등장하는 컷은 '이게 내 유서야'라고 준 DVD였다. 자기 삶을 기록하고 싶은 욕망이 큰 분이라 쓸 수 있는 여러 가지(영상)가 있었다. 다만 다른 분들은 그런 식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되게 많고, 말씀해주시는 것들도 (부분이) 생략돼 있거나 모호했다. 그게 저를 되게 답답하게 하면서도 이분들의 삶을 깨닫게 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강유가람 감독은 "나키 님은 주방노동을 계속해야 해서 촬영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만나 뵙기도 힘들고… 찍으러 갔을 때도 그 노동환경을 위협받는 거다. 촬영하기가 되게 어려워지고, 소스도 많지 않았던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영화는 당시 몸 상태가 꽤 좋지 않았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25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이태원' 인디 토크가 열렸다. 왼쪽부터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이태원'의 강유가람 감독 (사진=김수정 기자)
사실 '이태원'은 2016년부터 다양한 영화제에 줄줄이 공식 초청되며 관심을 받은 작품이지만 개봉할 수 있으리라고는, 강유가람 감독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어디까지 더 공개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나키 님이) 조금 저어하셔서 그럼 이 정도로 하지- 하고 저도 생각하고 있었다. 개봉까지는 어려웠던 것 같다"라며 "김주희 선생님과 같이 새해 인사를 하러 갔다가 제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얘기해주셔서 되게 감동했다"라고 말했다.
삼숙, 나키, 영화는 '이태원'을 어떻게 봤을까. 강유가람 감독은 "삼숙님 같은 경우는 두 번 보셨다. 삼숙 님은 6·25 경험하고 자수성가한 분이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되게 많이 주고 싶어 하셨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되게 많이 하셨는데 제가 그런 걸 다 안 넣었다"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이어, "왜 그걸 안 넣었냐고 화를 내시고, (촬영을) 한 명씩 (쭉)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왔다 갔다 해서 정신이 없다고 하시더라"라고 부연해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강유가람 감독은 "나키 님은 왜 그랜드올아프리만 나왔나, 세븐클럽 유엔클럽 등 다른 것도 많았는데 다른 클럽이 안 나와서 아쉽다고 하셨다. 영화 님은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보기 싫다고 해서 계속 안 보셨다. 이번에는 보시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어제 가자고 했더니 '크리스마스 이브라 안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라고 답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이태원'을 찍으면서 가졌던 기록자의 자세에 관해서도 들려줬다. 그는 "이분들의 삶이 이태원의 급격한 개발과 같이 얽히면 좋겠다는 기획의 지점이 있었다. 이태원이란 공간 변화를 역동적으로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파고가 계속 있었던 것 같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정도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때가 폴리캐틀이 팔린 그 장면이었다"라고 밝혔다.
강유가람 감독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방문했다. (다들) 물어봤던 것 모두 답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얘기를 들었다. 나키 님은 개인적인 얘기를 나중에 해 주셨는데, 이 얘기까지 해 주신 걸 보니 나에게 신뢰가 생기셨나 보다 싶었다. 영화에 담기진 않았지만. 이분의 삶에 대해 조금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기지 않았나 하면서 촬영을 마무리했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만큼, 현재 눈여겨보고 있는 장소가 있냐는 질문에 강유가람 감독은 "사실은 계속 이태원에 관심을 가진다"라고 답했다. 그는 "만약에 다른 공간을 또 찍는다면 저는 '이태원' 2탄을 찍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IPTV나 다운로드 서비스 같은 2차 공개 없이 오직 극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이태원'은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