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오관영 "배구해설 30년…인연의 소중함 알았죠"

해설가·교육자·목사·기업인 ''종횡무진''…대학총장, 노인교회 개척 꿈

 

서울 예일초등학교 교장실에서 만난 그. 카랑카랑했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다. 양 미간의 주름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나 거침없는 입담은 여전했다. 그가 풀어놓는 얘깃자루는 흥미진진했다.

''한국 배구 해설의 산증인'' 오관영(70). 세인들에겐 배구 해설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을 지녔다. 98년 해설 마이크를 놓은 그는 2002년부터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성기호)와 꿈의 교회(담임목사: 김학중) 협동목사를 지냈다. 지금은 미션스쿨인 학교법인 예일학원(설립자 김예환) 이사장이다. 올 2월부터 예일초등학교 교장 목사도 겸하고 있다.

[BestNocut_L]잘 나가던 ''배구쟁이''는 왜 목사가 될 결심을 했을까. "화려한 삶에 도취되어 내 갈 길을 일찍 못갔다는 후회가 있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오관영은 14년 전 10년 넘게 투병하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아내의 시신을 앞에 놓고 ''온전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독백했다. 그즈음 예일재단 김예환 박사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2002년 목사 안수를 받기 얼마 전 관상동맥경화 수술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그는 목사가 됐다.

오관영하면 역시 배구 해설을 빼놓지 못한다. 오관영은 용산중 3학년부터 경희대 재학 중까지 배구를 한 경기인 출신. 그는 68년 2월부터 98년 2월까지 꼬박 30년간 배구 해설을 했다. 동양방송(TBC)에서 시작해 80년 TBC가 KBS에 통폐합된 이후론 KBS 배구 전속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98년 실업연맹전(충무) 중계가 마지막이었다.

숱한 배구 명승부의 현장엔 늘 오관영이 있었다. 시청자들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승리의 순간 환호했고, 패배의 순간 탄식했다. 최고 명승부로 기억되는 91년 배구월드컵 독일전(3-2 승리), 96년 슈퍼리그 4차전(고려증권 3-2 현대) 중계석에도 그가 있었다. 마낙길의 끝내기 쳐내기 공격으로 5세트에서 11-14로 뒤지던 경기를 17-15로 뒤집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을 때, 5세트 17-16 상황에서 이수동(전 고려증권)의 스파이크가 현대 코트에 꽂히면서 고려증권이 우승했을 때, 그는 팬들과 함께 울먹거렸다.

주변에선 그를 ''움직이는 배구 백과사전'', ''배구해설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했다. ''배구해설=오관영'' 등식이 성립했다. 배구현장을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요즘도 배구기사 밑엔 ''오관영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댓글이 심심찮다. 그는 ''체육 한국을 빛낸 영광의 얼굴 100인''(1928~1998년)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관영의 해설은 색깔이 뚜렷했다. 해박한 지식은 기본. 목청을 돋우지 않아도 늘 긴장감이 묻어났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경기의 맥을 짚어줬다. 시청자들이 완벽하게 경기에만 몰입하게 해줬다. 쓴소리는 잘했는데 대신 소신과 원칙이 있었다. 실력보다 저평가된 선수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스타선수는 못하면 호되게 질책했다. 많은 스포츠팬들이 오관영을 ''내 인생의 해설자''로 꼽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 아찔한 해설가 데뷔무대…김재길 PD와의 인연

 

그에게도 햇병아리 시절은 있었다.

오관영은 68년에 처음 배구 해설과 인연을 맺었다. 김재길 당시 동양방송(TBC) PD의 권유가 있었다. 그때 환일고 체육교사였던 오관영은 대학원 공부를 병행했다. 그런데 나이로는 8년 선배이지만 대학원 1년 후배였던 김재길 PD가 대학원 논문 발표회에서 발표실력이 탁월한 그를 발탁했다. 즉석에서 배구해설을 제의한 것.

해설가 데뷔 무대는 그해 2월 TBC-중앙일보 고교배구대회. 고 남정우 아나운서와 콤비를 이뤘다. 30년 해설인생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큰 실수를 저질렀다. "대결하는 두 팀의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났죠. 그래서 솔직하게 ''저 팀은 수준 이하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중계차 안에 있던 김재길 PD가 유선전화로 대뜸 ''야, XX야, 이게 어디 주최인데 수준 이하야?'' 그러는 거에요."

중계방송이 끝난 후 김재길 PD가 오더니 툭 치면서 "기분 나빴지, 잊어버려" 그러더란다. "그때는 나이를 몰랐죠. 나보다 체구도 작고, 어린 것 같은데 반말을 하거든. 알고 보니까 나보다 8년 위인 거야." 오관영은 몇 년 전 자서전 원고를 써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래서 책 제목이 ''새끼가 어른이 되기까지''에요."

김재길 PD는 ''대한민국 스포츠 PD 1호''다. ''까까 국장''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오관영의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백두''. 해설가 오관영의 트레이드마크는 희끗희끗한 머리였다. "88년쯤 염색을 했어요. 방송 끝나고 집에 가면 동네 애들이 ''할아버지에요?'' 자꾸 놀리는 거야. 그때 할아버지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었거든요."

김재길 PD와의 인연은 질기다. 해설 초년병 시절, ''마이크는 열려있으니까 아무 때나 치고 들어가라''는 김재길 PD의 조언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오관영이 김재길 PD에게 소개해줘서 하일성이 TBC 야구해설가로 입문했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김재길 PD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만난다.

◈ "하다보니 30년 됐죠"…유수호 아나운서와의 인연

 

스포츠중계에선 스포츠캐스터와 해설자의 궁합도 중요할 터.

원종관, 임문택, 최평웅, 임건재, 유수호, 허주…. 오관영을 거쳐간 아나운서는 얼핏 꼽아도 열손가락이 모자란다. 특히 팬들은 80~90년대 배구 전성기 시절 ''오관영-유수호'' 콤비를 잊지 못한다. 혹시 생중계 중 싸운 적은 없을까. "아나운서마다 자기 스타일이 있어요. 해설자 몫까지 다 하는 사람이 있고, 해설자 몫은 철저히 남겨주는 사람도 있고. 전 아나운서에 맞춰줘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유수호와의 우정은 각별하다. 오관영은 2006년 KOVO컵 양산 프로배구대회 때 3일간 해설가로 깜짝 복귀했다. "그때 후배 해설가 3명이 모두 일정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나봐. 방송사에서 전화가 온 거야. ''난 하고 싶지만 후배들이 볼 때 자리 뺏는 거 같지 않겠느냐'' 거절했지. 근데 유수호한테 전화가 왔어. ''형이 와줘야 돼. 사흘만 해줘'' 바로 달려갔지."

90년대까지 배구해설은 오관영의 독무대였다. 요즘은 배구 해설자가 넘친다. 배구 V리그 전 경기를 생중계하는 KBS-N 스포츠 해설진 박미희, 최천식, 김세진, 문용관 등은 우리에게 친숙한 스타 출신이다. 내친 김에 후배들의 해설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오관영은 지금도 배구 중계를 꼬박꼬박 챙기고, 짬나면 배구장을 찾는다. 올 초에는 칼럼니스트로 변신해 한국프로배구연맹(KOVO) 홈피 배구전문웹진에 ''오관영의 Volley토크''도 연재했다.

"다들 잘해요. 평은 안할래. 다만 개인적으로 만나면 얘기는 해줘요." 그러면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아직까지 오관영 마니아가 있다는 건 30년을 해서 익숙해져서 그런 거지.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빨리 익숙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싫증을 느끼는지 스스로 공부해서 터득해야죠."

30년간 배구해설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처음부터 ''언제까지 해설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을까. "그런 건 없었죠. 하다 보니까 수명이 길어진 건데…. ''여기까지 왔으니까 30년 채우자'' 그렇게 된 거죠.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시청자들이 ''바꿔라'' 그러면 바꾸는 거죠." 마지막 해설을 할 때 아쉬움이 들지 않았을까. "별로 느낌은 없었어요. 섭섭하다 그런 것도 없었어요."

◈ 알싸한 ''고려증권의 추억''…이강학 회장과의 인연

11월 22일 NH농협 08-09 프로배구 V-리그가 개막했다. 요즘 배구판은 ''''추억의 배구팀'''' 고려증권 열풍이 거세다. 돌풍의 중심엔 10년 만에 현장에 복귀한 대한항공 진준택 감독(86~98년 고려증권 사령탑)이 있다. 대한항공은 LIG, 현대, 상무, 삼성을 완파하고 1라운드 우승에 가장 근접했다. 이성희(GS칼텍스), 박삼용(KT&G), 박주점(도로공사) 감독, 어창선(흥국생명) 수석코치, 정의탁 청소년 남자대표팀 감독도 모두 고려증권 선수 출신.

고려증권 출신 중 유난히 프로팀 지도자가 많은 이유는 뭘까. "선수들이 배구기술 뿐만 아니라 지도자적 인성을 겸비해서 그렇죠. 잘 되는 팀은 숙소만 가봐도 알아요. 옛날에 고려증권은 손님 오면 고참선수들이 차를 날랐어요. 신참들이 어딜 감히…." ''''조직력과 끈기''''라는 고려증권 팀컬러는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스타들이 거들먹거리면 그 팀은 안된다. 그래서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준택 감독이 ''명장'' 소리를 듣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진 감독은 과묵하지만 뱃심이 두둑했죠. 지장, 용장, 덕장이었요. 나이 많은 선수들 데리고 고려증권을 4번이나 우승시키고. 그건 장군의 공이 가장 크죠."

 

98년 해체된 고려증권 배구단과 오관영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오관영은 고려증권 배구단(83~98년) 초대 단장이었다. 83년 고려증권 상무 시절 고려증권 배구팀을 창단했다. 먼저 14년간 환일고 체육교사(학생부장)로 일한 그가 기업체로 옮긴 이유가 궁금했다. "15년 정도 학교에 있으니까 갑갑한 거에요. ''''세상에 나가서 멋있게 살아보자'''' 맘먹었죠." 오관영은 지인의 소개로 79년 고려증권 계열사 동광제약 총무부장을 맡았다. 98년까지 6개 개열사를 돌면서 사장까지 했다.

고려증권 배구단 창단 과정엔 재미난 일화가 있다. "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88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됐어요. 전두환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불러 모았죠. 보너스를 주겠다는 건데, ''''팀을 하나씩 만들라''''는 지시였어요."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고려증권그룹 이강학(2006년 작고) 회장이 오관영 상무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회장님, 배구팀 하나 만드시죠. 83년 졸업 예정자 중에 좋은 선수가 많아요."

83년 1월 12일 고려증권 배구단이 창단됐다. 인하대·경기대·서울대 등 3개 대학 졸업생 중 문용관을 제외한 8명으로 팀을 꾸렸다. 장윤창, 류중탁, 김인옥, 김성범, 김상권, 남태성, 이원재, 이은규가 당시 창단멤버였다. "그때 장윤창이 팀 창단 주역 노릇을 했지. 현대자동차서비스랑 스카우트 파동이 날 뻔했는데 고려증권과의 의리를 지켜준거야."

고려증권은 슈퍼리그 통산 6회 우승했다. 그러나 98년 IMF 한파를 맞은 모기업의 부도 여파로 배구팀도 해체됐다. 98년 슈퍼리그 2차 대회에서 삼성화재에 0-3으로 진 게 마지막 경기였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진 감독과 선수들은 말없이 경기장을 떠났다. 경기장에서 목청껏 응원하던 고려증권 사원들도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고려증권 출신 중 현역 선수는 98년 당시 막둥이였던 손재홍(삼성화재)이 유일하다.

오관영이 공개하는 에피소드 한토막. 그는 해설할 때 유난히 고려증권 선수들에겐 박했다. 그래서 ''''중계할 때 왜 고려증권만 많이 나무라나''''는 항의전화에 시달렸다. 시청자 입장에선 ''''편파중계''''처럼 느껴진 것. 거기엔 깊은 뜻이 있었다. "그건 애증이지. 고려증권 선수들은 더 잘 해야 되는데…."

고 이강학 회장과 맺은 인연의 끈은 단단했다. 이 회장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말기 최연소 치안총수를 지낸 후 고려증권그룹을 세워 자수성가한 인물. 이 회장은 오관영의 배구해설에 매료됐다. 오관영이 79년 고려증권 그룹에 입사하면서 두 사람은 20년간 동고동락했다.

◈ 내 인생의 스파이크는…

 

오관영은 해설가, 기업인, 교육자, 목회자로서 모두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 우물을 파진 않았지만 어디에 있든 늘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았다. 무엇보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세상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그러나 단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평생지기''''를 알아보는 안목과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그 관계를 키우고 유지해나가는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삶이었다.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그의 남은 꿈은 무엇일까. "노인교회를 개척하고 싶어요. 못해본 게 하나 있는데 대학총장이에요. 농담으로 그래요. ''''교회 경로대학 총장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스파이크를 꼽아달라''''고 했다. "해설을 30년 했는데,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지. 오래 하다보니까 해외 나가면 굳이 인사 안해도 외국 배구 관계자들이 다 알아봤어요. 각종 국제대회 중계 하느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폭넓은 삶을 살았죠." 오관영은 72년 뮌헨 올림픽을 시작으로 올림픽만 6번 중계했다. 그동안 해설한 경기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의 오관영''은 배구해설 국내 1인자를 넘어 30년간 ''대한민국 국가대표 해설가''였던 셈이다.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배구장에서 후배들이 반겨줄 때 가장 좋고, 지난해부터 배구 인기가 살아나고 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오관영. 그는 어쩔 수 없는 ''''배구쟁이''''였다.

오관영 프로필
교육자- 1938년 10월 6일 서울 출생. 63년 경희대 체육대학 졸업, 69년 동 대학원 체육학 전공. 64년~78년 환일고 체육교사. 98~2001년 환일고 교장. 현재 예일학원 이사장 겸 예일초등학교 교장

기업인- 79년~98년 고려증권그룹 부장~사장. 83년 고려증권 배구단 초대 단장

체육인- 68년 2월~98년 2월 배구해설. 체육 한국을 빛낸 영광의 얼굴들 100인(28년~98년) 선정

목회자- 2001년 성결교 신학대학원 졸업. 2001년 9월 성결대학교 체육교육과 객원교수. 2002년 대한성결교회 81회 총회 목사 안수. 2004년 1월 꿈의교회(담임목사 김학중) 협동목사, 평촌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성기호) 협동목사. 현재 영성훈련단체 ''''사랑의 불꽃 운동본부'''' 지도목사

0

0

전체 댓글 0

새로고침

    제 21대 대통령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