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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박찬호, 최초의 역사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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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안 특급' 박찬호(39). 애칭에 '코리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선수가 또 나올까.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새벽 잠을 설쳐가며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등판 경기를 TV로 시청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라가 경제 위기로 신음하던 IMF 시절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PARK'이라는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전해온 승전보는 활력소이자 희망이었다.

    1991년 제1회 한일슈퍼게임이 개최됐다. 한국과 일본 야구의 격차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로 불리는 미국프로야구는 그보다 더 멀고 높은 무대였다. 박찬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그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1994년 1월 계약금 120만달러는 받고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박찬호가 발걸음 하나하나는 곧 새로운 시작이자 역사의 기점이 됐다.

    1994년 4월8일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올랐다. 1996년 4월에는 역사적인 첫승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국내 선수로는 사상 첫 메이저리그 10승 투수가 됐다. 2001년에는 개막전 선발투수의 영예를 안았고 처음으로 올스타전 무대도 밟았다.

    박찬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자릿수 승리(14-15-13-18-15)를 달성했다. 리그 정상급 선발투수이자 이닝이터였다. 이 시기에 후배들의 미국 진출 러시가 시작됐다. 박찬호가 모델이자 선구자였음은 물론이다.

    박찬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기자회견에 당대 최고의 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38홈런-100타점' 행진을 이어가던 거포 라파엘 팔메이로가 동석했다. 팔메이로는 "그는 우리가 찾던 에이스다"라며 '코리안 특급'의 입단을 환영했다. 그런 평가를 받는 선수가 또 나올까.

    5년 6500만달러의 초대형 계약. 언젠가 한국 선수가 그 규모를 넘어서는 계약을 체결할 날이 오겠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상과 부진 탓에 텍사스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박찬호는 '저니맨' 신세가 됐고 선발 보직에서 점차 멀어졌다. 하지만 역경을 이겨냈다.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 선수로는 두번째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그 의미가 남다른 '핀 스트라이프(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홈 유니폼을 뜻함)'을 입은 첫 국내 선수가 됐다.

    박찬호는 미국 무대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최초'의 역사를 썼다. 2010년 10월2일 플로리다 말린스전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찬호는 3이닝동안 탈삼진 6개를 곁들이며 무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리고 통산 124번째 승리를 수확했다. 일본이 낳은 에이스 노모 히데오를 넘어 아시아 출신 최다승 투수로 역사에 기록된 순간이다.

    박찬호는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메이저리그 경기를 지상파 TV 편성에 올려놓았다. 박찬호는 LA 다저스를 '국민팀'으로 만들었다(후배 류현진이 이어갈 기세다). 미국 야구의 전파는 한국 야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중계 방송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팬들은 박찬호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다. '선동열이 낫냐, 박찬호가 낫냐'는 논쟁이 한동안 온라인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BestNocut_R]일본을 거쳐 돌아온 한국 무대. 팬들이 알던 박찬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하지만 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사상 첫 700만 관중 돌파, 한화 구단 역사상 첫 50만 관중 돌파의 역사를 박찬호가 함께 썼다.

    미국에서의 17년,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보낸 2년까지 영욕의 19년을 뒤로 한 채 '코리안 특급'이 마운드를 내려온다. 늘 최초의 역사를 썼던 한국 야구의 아이콘, 박찬호의 퇴장은 한국 야구의 스펙트럼을 넓혔던 한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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