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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졸 학력으로 검찰 사무관, 그 7전8기 인생"



사회 일반

    "초졸 학력으로 검찰 사무관, 그 7전8기 인생"

    • 2008-01-08 17:16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정병산 검찰사무관의 아름다운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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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 선수의 유명한 이 말,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1977년 카라스키야와의 챔피언 타이틀 매치에서 4번이나 KO를 당하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오히려 KO로 승리를 거뒀죠. 그야말로 4전5기의 신화를 만들어냈는데요.

    오늘 초대손님은 ‘7전8기’ 인생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수원지검 성남지청의 검찰수사관 정병산 씹니다. 전라도 두메산골에 태어난 그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이발소 종업원이 됐는데요. 이발소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검찰 공무원이 됐고, 감사한 마음으로 검찰생활을 하던 그가 2000년도부터는 5급 사무관 시험에 도전합니다.

    업무 여건상 평일엔 짬을 내기가 어려워 쉬는 날엔 빠짐없이 사무실로 나와 책과 씨름했고, 7번의 낙방 끝에 결국 합격했습니다.

    “남들에겐 평범한 일이지만 저한테는 벅찬 기쁨입니다”라고 말하는 정병산 검찰사무관. 그의 아름다운 도전기, 1월 7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했던 시험에 합격해

    [BestNocut_R]▶ 7번의 낙방 끝에 5급 검찰 사무관 시험에 합격을 하셔서 축하 많이 받으셨죠.

    네. 과분하게 많이 받았습니다.

    ▶ 눈물나지 않으시던가요?

    그럼요. 처음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화장실에서 남몰래 많이 흐느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처음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 제일 먼저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동안 저한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늘 옆에서 밝게 저를 내조를 해주고 고생해 준 아내였습니다. 한때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있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집사람한테 우울증 치료를 해주겠구나 싶어서 먼저 집사람에게 전화했습니다. 긴 말도 못하고 그냥 “됐어, 됐어.”라고 하고는 바로 화장실로 갔습니다.

    ▶ 그 때 사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제 말만 하고는 전화 끊고 화장실로 가버렸기 때문에 몰랐는데, 저녁에 퇴근해서 물어보니까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장모님께 전화를 해서 또 울었다고 합니다.

    ▶ 몇 분이 시험을 보셔서 몇 분이나 합격하신 건가요?

    제가 정확히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이번에 아마 215명이 봐서 50여명 정도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어떤 것을 시험을 보는 건가요?

    1차 시험은 헌법과 행정법 객관식 시험을 보고요. 2차 시험은 형법과 형사소송법 논술시험을 봅니다. 그런데 형법, 형사소송법 논술이 고시 수준입니다. 사법고시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형법, 형사소송법 논술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 그 전에도 7번 하셨으니까 8번째 보실 때는 쉽게 생각되거나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볼 때마다 어렵습니다. 크게 보면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해마다 시험문제가 틀리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도 시험 보고서 반신반의 하는 정도였지, 자신감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많이 떨어지고 해서 ‘그만 봐야겠다, 자꾸 되지도 않는 것, 5급 사무관부터는 소위 관운이라는 것도 필요하다는데...

    내가 관운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해서 이번에 억지 한 번 더 부려보고 이번에도 안된다면 내 갈 길이 아니구나 하고 접으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어요. 그래서 보고 나서도 거의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제 장래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바깥 경기도 좋지 않아서 나가서 개업을 한다는 것도 엄두가 안 나고, 안에서 근무하자니 제 또래는 전부 이미 다 승진해서 멀리 올라가 버렸는데, 후배들 보는데 눈치도 보이고요. 바깥에서는 저희 안의 조직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공무원사회가 철저히 계급사회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버틴다는 것이 강심장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다행히 참 결과가 좋아서 기쁩니다.

    ▶ 그럼 ‘검찰 수사관’이 되신 건데요. 검찰 수사관은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일단 ‘수사기관’이라고 하면 거리감도 있고,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제가 지금 30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지금도 경찰서 앞에 가면 별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일반 서민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또 저희 업무 자체가 남을 탓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선입견이 있죠.

    ◇ 초등학교 때는 늘 1등... 가난한 살림 때문에 중학교 진학 포기

    ▶ 태어나신 고향은 어디시죠?

    정확히 전라남도 승주군 황정면 임산리 입니다.제가 살던 곳은 아주 두메산골이기 때문에 그저 위로 쳐다보면 하늘이고, 옆으로는 산이 삥 둘러 있었기 때문에,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깃불이 없었습니다. 제가 졸업하고 1년 있다가 무작정 상경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전기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제가 있는 동안은 등잔불 밑에서 살았습니다.

    ▶ 형제분들은요?

    제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이 계시고, 제가 수기에서 보다시피 쌍둥이 형으로 태어났습니다.

    ▶ 쌍둥이로 태어나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셨나요?

    네. 주위에서 쌍둥이와 산모, 셋 다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희 쌍둥이를 가졌을 때 너무 없는데다가 못 먹어서 아주 셋 다 죽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살아나게 되어서요. 그 뒤로는 젖도 부족하고 밥구경을 하기도 힘들어서 어릴 때 얘기를 하면 저희 둘다 산다는 것은 기적이었다고 합니다.

    ▶ 그렇게 어려우셨군요. 정말 혹독한 보릿고개를 겪으셨겠어요.

    ‘송쿠’라고 들어보셨나요? ‘송쿠(‘송피’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해서 소나무 겁껕질을 자르면 그 안에 부드러운 껍데기가 있습니다. 그것하고 쑥을 뜯어서 먹었습니다.

    ▶ 초등학교는 들어가셔서 공부를 잘하셨다고요.

    네. 공부는 1등을 했습니다. 시골학교이기 때문에 한 교실에서 60명 안팎이 6년동안 같이 공부하고 졸업했는데, 항상 석차별로 자리를 앉았어요. 그래서 키는 제일 작은데 우리 쌍둥이 형제가 제일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서로 1,2등을 하고, 마지막에 6학년을 졸업할 때는 제가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 초등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셨던 건가요?

    초등학교 졸업을 한 달 남겨두고 ‘졸업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졸업하려면 졸업비를 내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졸업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때까지 남의 집에서 머슴으로 사셨는데, 아버지 연세도 많으시고, 제가 초등학교를 마치면 아버지가 그만 두시고 제가 대신 그 대를 이어서 남의집살이를 하는 것으로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었죠.

    이름 석 자 알았으니까 진학도 못하는데 졸업은 해서 뭐하냐고 해서 그만 두고 땔나무 하러 다니기 시작했죠.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이 친구들 편에 나오라고 하셨는데도 안 나갔더니, 십여 일이 지나서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무조건 내일 나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날 나가봤더니 교무실로 아무도 모르게 부르셔서 학교에 낼 졸업비 돈을 주시더라고요.

    내일 졸업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너희들 집에서 가져온 것처럼 다른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게 해서 내라고 하셨어요. 저희 두 형제 모두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조성용’ 선생님을 못 잊습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참 선생님 속을 썩인 학생인데, 그런데도 수석 졸업장을 주면서 졸업을 시키면서 그 때 선생님이 제게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졸업을 안 하게 되면 무학이고, 그나마 초등학교 졸업을 하면 국졸은 된다. 국졸이 나가서 얼마나 너희들에게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졸업장은 들고 나가는 것이 낫다. 어딜 가서든 환경이 어떻든 최선을 다해라.” 라고 하셨어요.

    ▶ 혹시 그 후에 선생님을 찾아뵈신 적이 있으신가요?

    월간 ‘국가고시’라는 잡지를 만드는 ‘법지사’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제가 서울 객지생활을 하면서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겨 주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주변에 물어볼만한 사람이 없어서 월간 ‘국가고시’에 일주일간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을 써서 보내면 답이 오고 해서, 그렇게 물어서 합격을 했어요. 제가 출판사 덕분에 합격한 것 같아 감사의 편지를 했거든요.

    그랬더니 합격수기를 써달라고 해서 써서 냈더니 다음 호 책에 실려서 나왔어요. 그래서 그 책을 담임선생님한테 좀 보여 드리고 싶어서 수기에도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써서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서무과에 편지를 보내서 선생님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편지와 함께 그 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참 좋아하시면서 “장하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해주셨어요. 지금도 그 책을 가보로 보관하고 계시답니다.(웃음)

    ▶ 그럼 중학교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 때 조성용 선생님께서 중학교 시험을 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갈 수도 없는 중학교 시험을 봐서 뭐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나도 너희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나도 평가를 받고 싶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순천 매산중학교가 일류 중학교라서 공부를 못하면 원서를 잘 안 써줍니다.

    그런데 중학교 시험을 보는데도 돈이 꽤 들어가더라고요. 그 비용을 마련할 수도 없고, 집에서는 시험을 붙어서 못가면 저희도 속상하고 부모님도 속상하니까 아예 중학교 시험을 못 보게 하셨어요. 그래서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학교 끝나고 나면 동네 오는 길목에 있는 부잣집에서 소위 동냥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 도저히 안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또 비용을 대주셔서 중학교 시험을 봤습니다. 그래서 결국 매산중학교에 둘 다 합격을 했습니다. 지금도 ‘136번’, ‘137번’ 수험번호를 잊지 못합니다.

    ▶ 그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도 보고 했던 것이 정병산 씨 인생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시험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선생님이 가보자고 하시는데, 제가 가지도 못하는 학교를 가면 뭐하냐고 했는데도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합격자 명단에서 저희 둘 이름을 확인하고는 선생님이 추운데 앉으셔서 흐느끼시더라고요. “내가 좀 여유만 있었다면 너희들 진학을 시켰을 텐데, 가난이 한이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걸로 저희는 학교는 끝난 거죠.

    그 뒤로 낮에는 죽어라고 일을 하고, 밤에 책을 보자니 힘이 들어서 좀 쉽게 책을 볼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했는데, 마침 이웃동네 사람이 이발소에 가서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면 힘도 덜 들고 낮에 시간이 날 때는 틈틈이 책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공부할 생각으로 그 이발소에 취직을 했어요.

    ▶ 그 때가 몇 살 때였나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겁니다. 졸업하고 몇 달 뒤에 일이예요. 제가 그 덕분에 그래도 서울에서 안 굶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발소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순천 시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토요일이면 집에 왔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다시 순천으로 갑니다. 제 또래 애들을 보니까 도저히 서러워서 못살겠더라고요.

    정말 순천의 일류 중학교를 합격하고도 못 가니까 제가 ‘안되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라고 생각하고 일을 집어 치우고 집에 와서 며칠 빈둥거렸어요. 그랬더니 부모님이 “좋은 데 취직했는데 왜 왔냐?”라고 하셔서 제가 차라리 시골 머슴살이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한 번 가보자. 죽기 아니면 살기다.’ 라고 해서 책 몇 권과 옥편, 수석 졸업할 때 받은 ‘도교육감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아버지 몰래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죠.

    ◇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몰래 기차타고 서울로 상경

    ▶ 그러면 서울 가실 때 무슨 돈으로 기차를 타셨어요?

    돈이 없어서 도둑 기차를 탔습니다. 정식 개찰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언덕에 업드려 있다가 기차가 왔을 때 막 뛰어서 기차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죠. 화장실에 앉아서 문 두들기면 개표 역무원이 올까봐 겁이 나서 아예 문을 잠그고 앉아서 서울까지 온 거죠. 그런데 한참 지나서 차가 안 움직이길래 밖에 나와보니 차 안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왜 차가 멈췄나 창밖을 봤더니 ‘서울역’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책에서만 보던 서울에 막상 와보니까 참 신기하기도 했는데, 표가 없으니 개찰구로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니 염천교 쪽으로 문이 열려 있고 리어커 꾼들이 왔다갔다 하길래 그 틈새로 막 뛰어나왔어요. 그 때 마침 경찰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저 놈 잡아라.”하면서 막 쫓아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힘껏 뛰어서 길가의 많은 군중 속에 휩싸여 버리니까 더 쫓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서울 땅 밟는데 성공했습니다.

    ▶ 서울에 내리셨을 때가 몇 년도였나요?

    그 때가 1967년이나 1968년, 그 사이일 겁니다.

    ▶ 그 때는 그렇게 서울이 많은 발전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시골소년의 눈에는 신기한 곳이었겠군요.

    그럼요. 네온사인도 신기했고요. 서울역 앞에 있던 큰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고 신기해서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쳐다봤었어요. 그러면서 ‘이 넓은 서울에서 내 목숨 하나 못 살리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 그럼 서울에 올라온 첫 날, 어떻게 하셨어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노숙을 했어요. 처음에는 하도 신기한 것이 많으니까 배고픈 것도 참아가면서 3-4일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는데 밥 달라는 소리가 차마 안 나와서 들어갔다가 나오고, 또 다른 곳에 들어갔다 나오고 했어요. 나중에는 책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것조차도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남자가 “야, 너 그 보따리, 힘들어 보인다. 내가 들어줄까?” 하더니, 제 대답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제 보따리를 나꿔채서 앞으로 가더라고요. 그 당시 한국은행과 중앙 우체국 사이에 육교가 하나 있었어요. 그 육교를 올라가는데 저도 부지런히 따라가봤지만 기운이 없어서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그리고는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소매치기를 당한 거죠. 그 사람은 아마 그 보따리에 돈이라도 들어있는 줄 알았었나봐요.

    ▶ 그 배고픈 것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게 굶고 다니다가 신세계 백화점 돌아가는 쪽에 공사장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 공사장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길래 ‘내가 저 물을 좀 먹으면 기운을 차리겠는데... 시골에서 들을 때는 서울에 가면 물도 사먹는다는데 돈도 없고, 설마 저런 물을 팔까?’ 싶어서, “아저씨, 저 물 얼마에 파나요?” 하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야, 이놈아! 저 물을 누가 파냐? 실컷 처먹어라.”라고 하셨어요. 그 물을 좀 먹고 났더니 기운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기운이 오래 갈 줄 알았는데 금방 사그라졌어요. 그리고 나서 몇 발짝 걸어가다가 제가 쓰러졌던 것 같아요. 기운이 없으면서 앞이 노래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이후로는 생각이 안나요.

    ▶ 그럼 어디서 깨어나셨어요?

    누가 지팡이 같은 것으로 툭툭 건드린 것 같아서 눈을 떠보니까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쓴 노인 한 분이 저를 건드리신 거예요. 제가 눈을 슬그머니 떠서 올려다봤더니 왜 이 추운 데서 누워있냐면서 저를 일으키시더라고요. 제가 일어나면서 ‘내가 이렇게 죽으려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 아닌데... 성공하려고 왔는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서울에 올라올 때는 성공하기 전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지 고향에는 안 갈 작심을 하고 나왔거든요. 그 때 불현 듯 생각난 것이 제가 이발소에서 머리 감겨주는 것을 배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발소에 가서 머리감겨주는 일을 구해봐야겠다 생각하고 이발소를 가게 되었죠. 그런데 이발소에서 전라도 놈들은 도둑놈이라고 안 써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여섯 군데를 다녔는데도 전라도 사람이라고 취업이 안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서울말 흉내를 낼 수도 없고, 몇 군데를 더 다녀봤더니 한 곳에서 한 번 들어와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마침 머리를 깎고 난 사장님 풍채를 지닌 분이 계셔서 머리를 한 번 감겨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사정없이 감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장님이 “조그만 녀석이 머리를 참 시원하게 감는다.”라고 하셨어요. 그 때 주인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는 주인의 표정을 걱정어린 눈으로 쳐다봤어요.

    그런데 그 주인이 “너, 우리집에서 일 한 번 해볼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저는 정말 살았다고 생각했죠. 주인이 일당은 얼마 받냐고 물어보시는데 저는 일당이나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당은 필요 없고 그냥 먹고 재워만 달라고 했어요.

    ▶ 이발소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설움도 참 많을 것 같아요.

    제가 이발소에 취직을 해서도 제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 마음을 못 놓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을 떼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는 제가 그 것을 떼려면 천상 집에 편지를 해서 제 거처를 알려야 하는데, 저는 성공한 뒤에나 고향을 가려고 했기 때문에 대답만 해놓고 떼어주지 않았죠.

    그런데 한 두 달 지나니까 주인이 “못 떼면 놔둬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발소에서 여름에는 덜 추우니까 신문지 깔고 바닥에서 자고, 겨울에는 의자를 양쪽으로 돌려서 애들 머리 깎을 때 쓰는 널빤지를 고정해놓고 자고, 그 안에서 라면 끓여먹고 살았죠.

    ◇ 검찰 공무원 시험 준비... 계속된 낙방에 자살 기도까지

     

    ▶ 그러다가 이발소 생활을 정리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신 겁니까?

    이발소에서 주인 아저씨가 자꾸 이발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이것을 배우면 이발사밖에 더 되겠나 싶어서 고집을 부리고 머리감는 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책을 봤습니다. 어떻게 어떤 책을 봐야 하는지도 몰라서 무조건 두서없이 책을 보다가, 시골의 면서기라도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점에 한 번 갔습니다.

    ▶ 그것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시게 된 계기인가요?

    네. 그래서 서점에 가서 주인에게 면서기 되는 책을 좀 달라고 했더니, 9급 행정직 보는 책을 주시더라고요. 몇 장을 펼쳐 보니 검찰, 법원, 관세, 국세, 교정 등 쭉 있었는데, 검찰직이라는 것은 그 때 처음 들어봤어요. 그 때 경쟁률도 보니까 135:1인가 제일 센 것을 보고 욕심이 나더라고요. 경쟁률이 세다는 것은 뭔가 좋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서점 주인에게 “검찰직이 뭐하는 건데, 이렇게 경쟁률이 셉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검사 밑에서 일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시골에서 판, 검사가 최고 벼슬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아, 검사 밑에서 일하다 보면, 검사도 되겠구나.’ 싶어서 “그 시험에 맞는 책을 좀 주세요.”라고 했더니, “너, 학교 어디를 나왔니? 이 시험은 대학교 나와도 어렵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한 번 도전해보자고 해서 제가 검찰직 시험을 보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 막상 일하면서 공부하시느라 쉽지 않으셨겠어요.

    네. 그래서 많이도 얻어맞았습니다.

    ▶ 얻어맞다니요?

    밤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낮에 꾸벅꾸벅 졸고, 손님 머리 감으라고 하는데도 모르고 책을 보다가 “야, 이놈아! 공부를 하려면 네 집 가서 하지, 왜 여기서 공부냐?”라고 해서 또 얻어터지고 했었죠.

    ▶ 그럼 언제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나요?

    계속 시험을 보는데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저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기 때문에 영어를 몰랐는데, 그 때는 영어가 선택과목이어서 저는 헌법을 선택해서 무조건 암기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영어가 필수과목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했는데, ‘내친김에 영어 공부를 해보자. 영어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점에 갔어요. 주인에게 “영어의 ㄱ, ㄴ, ㄷ부터 배울 수 있는 책 있으면 주세요.”라고 했더니, 안현필 선생이 쓴 ‘영어기초확립’ 시리즈를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안현필 선생님의 ‘메들리 삼위일체’까지 보고 합격했습니다.

    ▶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자살까지 시도하신 적도 있어요. 시험에 계속 떨어졌기 때문에 좌절해서 그러신 건가요?

    예. 맞습니다. 제가 시험 몇 번 떨어지고 많이 낙심을 했었습니다.

    ▶ 몇 번을 떨어지신 건가요?

    세 번인가 네 번 떨어지고 나서, 이발사로 먹고 살기는 싫고, 그렇다고 시골에 내려가서 머슴으로 살 수도 없고,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해서 차라리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죠.(눈물)

    ▶ 그런 와중에 ‘마지막으로 내가 부모님 남산 구경을 시켜드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셨어요. 정말 효성이 남다르셨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어떻게 드셨나요?

    그래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니까 뭔가 기쁨을 한 번 드리고, 웃음을 한 번 드리고 싶었는데, 그 때 가장 쉬운 생각이 시골에서는 서울 구경이 최고의 구경이었거든요. 서울에 나온다는 것이 연고가 없으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서울 구경 좀 시켜드려야겠다 싶어서, 어머니, 아버지를 오시라고 해서 남산 한 바퀴를 돌았어요. 지금도 그 때 남산에서 찍었던 사진이 앨범 어딘가에 끼어 있을 겁니다.

    ▶ 그 때 케이블카도 있었죠?

    그 때 케이블카는 못 타고, 그냥 걸어서만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태워드리면서 잘 가시라고 하고, 저는 그대로 나와서 수면제를 여러 군데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한 움큼 사가지고 아무 여인숙에 들어가서 털어 먹어 버렸죠. 그 뒤로 저는 기억이 없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어느 허름한 병원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죽지 말고 내가 뭔가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었죠. 제가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해서 부모님께 할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운을 차린 후에 다시 이발소를 찾아 나섰죠.

    ▶ 그 때 조용필씨나 배호씨 노래가 삶에 많은 위로가 되셨다고요.

    거의 저는 소년기 때부터 힘찬 노래보다는 한이 맺힌 트로트풍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은 제가 검찰청에 다니면서 삼청동에 하숙할 때인데, 라디오를 틀어놓고 매일 한 맺힌 트로트를 틀어놓으니까 하숙집 주인 아들들이 짜증난다고 저 소리 좀 안 듣게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웃음)

    ▶ 가난했던 그 시절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는 가난 때문에 진학도 못했으면서 이상하게도 가난이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어쩌면 가난 때문에 제가 의지와 투지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부모님이 저에게 그런 강한 의지와 투지를 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험 치러 갈 때도 부모님 산소 쪽을 향해서 절을 하고 시험 보러 갔고, 시험 본 뒤에 또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고, 합격하고 나서 또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시험이라는 핑계로 부모님 제사나 명절 때 전혀 안 가봤거든요. 그래서 큰 죄를 진 것 같았습니다.

    ▶ 1978년,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공무원 시험에 드디어 합격을 하신 건가요? 어디로 첫 출근을 하셨나요?

    첫 출근지가 서울지방 검찰청 집행과였습니다.

    ▶ 첫 출근하던 날은 어땠나요?

    정말 꿈 속 같았습니다. 너무너무 다른 분위기의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잠시 제가 지나가는 길목 같이 느껴졌을 뿐, 제 직업이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녁마다 꿈을 꾸어도 이발소에서 머리 감기던 꿈, 옛날 시골에서 땔나무 하던 꿈만 꾸게 되고, 내가 어쩌다 잘못 들어온 건 아닌가, 언젠가 쫓겨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 속에서 몇 년을 근무했어요. 한 삼 년 정도 지날 때까지도 그런 생각이 안 버려지더라고요.

    ▶ 아무래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지 못한 점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만든 건가요?

    예, 물론이죠. 그래서 언젠가는 학력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어떤 일로 해서 학력을 써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학력 때문에 나가라는 소리 듣게 될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한 3년 지나니까 자리가 안정이 되더라고요.

    ▶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셨던 것 아닌가요?

    네. 다른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한 사람보다 뒤떨어질까봐, 어느 하나 부족해서 나가라고 할까봐 불안했는데, 한 3년 지나니까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제 천직이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 검정고시나 방송통신대를 통해서 계속 공부를 하는 방법도 있으셨을 텐데요.

    지금도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고 후회가 됩니다. 공무원 생활 하면서도 검정고시로 고입, 대입을 보고, 그 뒤에 새로 생긴 방송통신대를 통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했어야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까 오늘날까지 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네요.

    ▶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제가 제 집사람을 만난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적이고 참 신기한 일입니다. 집사람을 만날 무렵에 저는 검사가 한 번 되보겠다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부단히 열심히 하면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사법시험 준비를 계속 했는데, 갑자기 선을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누가 선을 보라고 하시던가요?

    성환에 사시던 작은 형님 댁에 잠시 부모님이 와서 계셨어요. 그 때가 제가 공주검찰청에 근무할 때입니다. 그래서 추석에 부모님 인사차 와서 하루 저녁 자고 그 날 꿈을 꾸고,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버스타고 가다가 아가씨라도 하나 보려고 꾼 꿈 아니냐?” 하시는 거예요.

    ▶ 무슨 꿈이었나요?

    그 꿈이 제 집사람을 만난 꿈입니다. 그래서 저는 꿈에서 본 사람을 만나서 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제가 어머니께 꿈 이야기를 하고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형님댁 전화벨이 울리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도 안 받길래 제가 전화를 받았어요. 그랬더니 생전 모르는 어떤 아주머니가 “삼촌, 선 좀 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선 볼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도 자꾸 아주머니가 예쁘니까 한 번 만나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쁘다는 것을 자꾸 강조하시길래 호기심이 좀 생기더라고요. (웃음)

    ▶ 그 때 정선생님이 몇 살이셨어요?

    서른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하도 이쁘다고 하시니까 그럼 얼굴이라도 한 번 구경해보자 싶어서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는 혼자 가서 선을 봤어요.

    ▶ 어디서 만나셨나요?

    성환의 ‘태양다방’이라는 곳에서 만났습니다. 다방에 들어갔더니 한 아가씨가 앉아 있는데, 딱 꿈에 본 아가씨더라고요. 옷 모양이나 머리모양이 다 똑같았어요. 그리고 결혼해서 처가에 가보니까 처갓집의 분위기나 집 입구가 꿈에서 본 그대로 재현되더라고요.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굉장히 얼굴이 온화하고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저는 마음에 들어서 용기를 내 “아가씨, 실례지만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라고 했더니 알려주더라고요.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서 공주에 내려간 뒤에 계속 연애편지 공세를 했죠. 그런데 답장을 한 장도 안 해주는 거예요.

    ▶ 지금 자제분은 몇을 두셨나요?

    아들 둘입니다.

    ▶ 한 자제분은 사법고시 준비를 한다고요.

    예.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휴일, 명절도 없이 사무관 시험 준비 하느라 경조사도 제대로 참석 못해

    ▶ 2000년도부터 5급 사무관 시험을 보셨는데, 사무관이면 간부가 되는 건가요?

    예. 간부입니다. 과장급이니까요.

    ▶ 그러면 일도 많이 바쁘시고, 나이도 사십대 후반이니까 공부하는 것이 무척 어려우셨을 텐데요.

    거의 보면 하다가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준비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시험장에서 병원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그만두지 않으면 계속 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2000년부터 시작해서 정말 7전8기를 했습니다.

    ▶ 말이 7전8기지, 그 동안 어려움이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안팎으로 압박을 받았죠.

    ▶ 그래도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고 집념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힘이였을까요?

    저는 제 집사람이나 자식들한테 아빠가 뭔가를 해냈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늘 방송국에 같이 온 아들도 제가 초등학교 나온 것을 엊그제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제가 확실한 제 과거 얘기를 안했거든요. 그래서 자식들과 집사람에게 제가 비록 체구가 작고 배운 것은 작더라고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제가 자꾸 시험에 떨어지니까 집안 분위기가 침체되고 팍 가라앉아서, ‘이거 안 되겠다. 내가 합격을 해서 집안 분위기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준비 과정이 참 힘드셨겠어요.

    제일 힘든 것이 자꾸 떨어지다 보니까 주위의 경조사에 자꾸 불참하게 되더라고요.

    ▶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공부를 하시고, 성공을 하신건지 노하우 좀 알려주세요.

    저는 집안일과 사무실 일 이외에는 늘 책에 매달렸습니다. 공휴일, 명절, 휴가도 아예 없었습니다. 휴가 안 가본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공직생활 20년이 넘으면 14일 공짜 휴가를 줍니다. 저는 그것도 마다하고 그 시간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나 다른 직원들은 정신 나간 놈이라고, 평생 다시 찾아 먹지도 못할 휴가를 버리면서까지 하냐고 했지만, 저는 일단 이것을 끝내고 다른 것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모든 것을 검찰 사무관 승진시험에 되고 나서 따져 보자고 한 거죠.

    ▶ 예전에 이발소에서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면서도 늘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지금은 어떠세요?

    참 만족하고 있습니다.

    ▶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정선생님의 자라온 환경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하신 것 아니겠어요?

    예. 제가 합격하고 기쁜 것이 저희 50명 합격자에게 난을 총장님께서 다 보냅니다. 그런데 저희 고향인 순천시장님께서 축하난을 보내 주셨어요.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번 드렸습니다. 신문에서 보고 고향 사람이 이렇게 훌륭하게 빛을 내주었다고 고맙고 반가웠다고 하시더라고요.

    ▶ 검찰 수사관으로서 투입되어서 해결하신 사건 중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요.

    성남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억에 납니다. 딸이 강간을 당했다고 아버지가 버스기사를 고소한 사건입니다. 그 때 버스 기사가 제 앞에 와서 울면서 “선생님,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강간 안했습니다.” 그 때 피해자는 스물한 살 먹은 차장 아가씨였고, 버스 기사는 40대 초반이었는데 그렇게 울면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심상치 않아서 이야기를 쭉 들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 생각에 이 사건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소인 아가씨를 불렀습니다. 그 아가씨를 식당으로 불러서 점심을 사주면서 “정말 강간을 당했다면 저 아저씨를 법정 최고형으로 처벌 받도록 해주고, 그렇지 않고 저 아저씨 말대로 화간이었다면, 저 사람 부양가족이 많다, 진실을 얘기해다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진실을 얘기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강간으로 되었냐하면, 그 차장 아가씨의 아버지가 그렇게 고소를 한 거예요. 상당히 무리하게 수사를 했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고소 취소를 할 것이냐고 말이죠. 그 때 검사도 상당히 난감했죠. 일단 구속이 되어서 우리 검찰에 왔는데, 그것을 특별한 사정없이 석방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생각 끝에 아버지를 불러서 딸이 강간당한 것이 아니라는데, 고소 취소를 하지 않으면 무고죄로 아버지를 처벌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고소 취하를 했습니다. 그래서 무혐의가 아닌 ‘공소권 없음’으로 해서 버스 기사의 누명을 벗겨준 일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런 일 했을 때 제가 검찰에 잘 들어왔다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 사건들이 더러 있습니다.

    ▶ 서울지검에 계실 때도 굵직한 사건들이 있으셨나요?

    서울에 있을 때는 제가 공안 사건에 참여를 했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님이라든지, 지금 대통합 민주신당 대표인 오충일 목사, 박형규 목사, 김병오 국회의원 같은 분들도 있었고, 그 때 한참 열사들이 나오던 시절이었죠. 그 때 일요일도 없이 교도소에 가서 조사하던 것이 지금 추억으로 남네요.

    ▶ 의지가 약하고, 집념이 약하신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 한 마디 해주세요.

    어떻게 보면 남들이 볼 때는 우리 검찰 사무관 승진시험이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엄청나게 벅찬 기쁨이고, 또 이렇게 되고 나니 과분한 축하를 받고 하는 것을 볼 때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실력이 좋아서 떨어지는 경우 없고 운이 좋아서 붙는 경우는 없는 것이니까, 일단 실력을 갖추게 되면 운은 저절로 찾아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살면 기쁨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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