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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홈런왕 김봉연 "자장면 먹고 싶어 야구선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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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BS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김봉연

    김봉연

     

    어린 시절 김봉연은 야구선수인 형을 따라 학교에 다니며 매일매일 형을 기다려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기다려도 형은 돌아오지 않는 것 아닌가? 형이 있던 교실을 들여다보던 김봉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이 자장면을 먹고 있는 것 아닌가!

    자장면을 먹을 생각에 바로 야구 선수가 된 김봉연은 그날부터 단 하루도 후보선수였던 적이 없었다.

    수많은 야구선수들과의 인연과 에피소드, 그리고 지금도 끝없이 노력하는 김봉연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김봉연 (극동대 교수/MBC-ESPN 해설위원)


    - 지난 7월에 올스타전 전야제에서 경기를 하시고, 감투선수상을 받으셨는데요. 오랜만에 상 받으시니까 기분이 어떠셨어요?

    아주 감계 무량했습니다. 제가 도루를 두 개 시도해서 하나 성공하고 하나 죽었는데요. 선수 시절에 해보고 싶었던 도루를 이런 친선경기에서 할 수 있어서 기분 좋았습니다. 사실 제가 82년부터 88년까지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도루 기록이 14개인데요. 김일권 선수와 합했을 때 그런 거고, 단독 도루는 두세 개 정도밖에 안될 겁니다.(웃음)

    - 지금 뵈니 굉장히 날씬하신데요. 그래도 현역 시절보다 4~5kg 더 찌신 거라고요?

    현역 때는 78kg 정도였는데요. 은퇴 후에 너무 살이 찌다보니 겁이 나서 다시 운동을 시작했어요. 92kg에서 체중 감량을 시작해서 지금은 83kg을 유지합니다.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7남 4녀 중 제가 5남입니다. 제 위로 형과 누나가 다섯 분이 있고, 제 밑으로 동생이 다섯 명입니다. 제가 딱 중간이죠.

    - 어릴 때 생활은 어땠나요?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큰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쌀 창고에 쌀이 그득하게 있었어요. 쌀 한 가마니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갔대요. 과일도 접으로 샀고요. 그리고 복날 같은 땐 각각 닭 한 마리씩을 다 안겨주셨어요.

    - 전주 중앙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셨는데, 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나요?

    제 바로 위의 형이 야구를 먼저 시작했는데요. 제가 형을 따라 다니면서 가방을 들고 다녔거든요. 근데 어느 날 가야 할 시간이 됐는데도 형이 나오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교무실 안을 들여다보니까 선수들이 자장면을 먹고 있는 거예요. 그때 ''나도 야구선수가 되면 자장면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 다음날부터 형이 야구하는 곳에 가서 저도 볼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야구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테스트를 시켜보셨어요. 그 테스트 하던 날부터 선수 은퇴하는 날까지 후보라는 걸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 선수가 되고 난 뒤 자장면은 드셨나요? (웃음)

    경기가 끝나는 날은 자장면을 사줬어요. 그 자장면의 매력 때문에 야구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처음 달았던 유니폼 넘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 27번 번호를 달았고, 프로야구 때까지 27번을 고수하게 됐습니다.

    - 중학교 땐 육상선수로도 활약하셨다고요?

    야구 좋아하는 분들은 김봉연이라고 하면 병살타 많고, 걸음이 느려서 야수들이 다루기 쉬운 타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대회가 있으면 육상대회에 나갔고, 중학교 땐 핸드볼과 농구 선수도 했어요. 그리고 축구경기가 있는 날은 축구 시합도 나갔고요. 그렇게 운동 대회가 있을 때마다 뛰곤 했는데, 그런 것들이 야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육상은 직진으로 뛰기 때문에 몸무게가 있는 사람이 속도를 더 낼 수 있는데, 야구는 베이스러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턴 하는 것도 기술적인 것을 요해요. 근데 제가 84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발목을 다쳐서 더 느려졌어요. 그리고 타구가 빠르다보니까 병살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죠.(웃음)

    - 야구명문 군산상고로 진학하셨는데요. 당시 함께 뛰던 선수들은?

    김준환, 김일권, 김우근 선수 등 해태 타이거즈의 원년 멤버들이죠. 당시 군산상고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함으로서 고교 야구계의 전국 평준화를 만들었다는 평을 들어요. 그때만 해도 스포츠, 문화, 정치, 사회 등 모든 것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전국대회를 재패하는 건 꿈같은 일이었어요. 그래서 군산상고가 우승했을 때 군산시민 12만 명 중 6만 명의 환영객이 나올 정도로 많은 한영을 받았어요.

    - 당시 서울에서 야구 잘 하는 고등학교가 많았죠?

    60~70년대만 해도 설린상고, 동대문상고 등 서울이 절대적으로 강했죠. 그 다음에는 대구상고, 경북고등학교 등 경북으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부산으로 넘어가요. 그리고 황금사자기에서 군산상고가 우승하면서 그 후에 광주일고가 생겼죠.

    - 군산상고 졸업 후 연세대에 입학하셨는데요.

    제가 워낙 촌스럽고, 머리는 새집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니까 "고대를 가야할 김봉연이 연세대에 와서 물 흐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어요.(웃음) 학교에서 발간하는 연세춘추 학교신문에 ''촌놈 김봉연''이라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해서, 그때부터 촌놈이란 별명을 얻었어요.

    - 당시 도루왕도 하셨고, 투수로도 활약을 하셨어요?

    저는 원래 투수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야구선수의 꽃은 투수에요.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테스트를 할 땐 투수부터 시켜봅니다. 투수를 잘 하는 사람들은 방망이도 잘 치고, 수비도 잘 하고, 도루도 잘 해요. 저는 연세대 1학년 때부터 투수를 하면서 3번 타자, 4번 타자를 했어요. 정기전은 아니었습니다만 연고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적도 있고요.

    - 당시 팬레터도 쇄도했겠는데요?

    제가 신문에 많이 나오다보니까 체육학과 교양시간에 도강을 들어오는 여학생들이 있었어요. 근데 저를 실제로 보고 난 뒤엔 실망감이 컸죠. 어쩌면 저렇게 하고 다니냐, 머리 좀 감고 다녀라, 고무신 좀 벗어라.(웃음) 하지만 저는 훗날 준비했던 것들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모양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래도 축제 때는 가끔 깔끔하게 하고 다녔어요. 하하.

    사실 저는 대학 1학년 때부터 목표를 설정했어요. 저희 큰 형님께서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저도 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2학년 때부터 교직과목을 신청했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연습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가는 게 제 하루일과였어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팝송을 부르면서 영어 공부에 취미가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하다 보니까 운동선수로서 장학점수가 나오게 됐어요. 친구들은 너같이 인기 있는 야구선수가 뭐 하러 도서관에 오냐고 했지만, 저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죠.

    - 1982년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했을 때 선수들 사이에 분위기는 어땠나요?

    어떻게 보면 역행을 한 거예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가 되면 이미 스타가 됐죠. 고교야구가 워낙 인기가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대학에 가면 시들해지고. 최종목표가 대표선수인데 저는 이미 실업팀에서 7~8년 동안 뛰면서 맡아 놓고 홈런왕도 하고. 할 건 다 해봐서 더 이상 목표가 없었어요. 근데 81년 중반부터 프로야구 태동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당시 제 나이가 30살이었는데요. 프로야구에 가면 한 2년은 더 뛰지 않겠나 싶어서 그때부터 술을 절제하고 체중 감량을 했어요.

    프로야구 원년에 부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중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서 기브스를 했는데요. 그 사이 상대방의 백인천 선수, 김우열 선수, 김성한 선수 등이 계속 홈런을 치면서 따라오고 추월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기브스를 풀고 반기브스 상태에 붕대를 꽉 묶고는 주장 권한으로 다른 선수 대신 대타로 나가서 홈런을 쳤던 기록이 있었습니다.(웃음)

    - 83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을 당시 얼굴에 314바늘을 꿰매셨다고요?

    친구 차로 여수를 갔는데요. 친구가 운전을 하고, 뒤에는 친구 부인이 탔어요. 그때만 해도 고속도로가 안 돼서 일반국도로 달렸는데요. 잠깐 조는 사이에 굽어지는 길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졌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가로수가 완충작용을 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해서 지금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사실 얼굴보다는 머리 쪽에 꿰맨 숫자가 더 많아요.

    - 팬들 때문에 병원에서 난리가 났었다고요?

    긴급뉴스에 위독하다는 속보가 나왔기 때문에 상당히 술렁였죠. 광주 전남대학이 생긴 이래 정문을 잠가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27일 동안 입원했는데 그 기간에 8000통의 편지를 받을 정도였어요.

    -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깨어나자마자 가족들에게 "여기가 어디야? 빨리 밥 줘. 나 운동장 가야 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가족들이 울면서 거울을 갖다 주는데 제 몸 전체가 붕대로 감겨있는 거예요. 절망했죠. 그래서 의사 선생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선수 생활에 지장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경과가 좋아서 지장은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그 다음날부터 도시락이랑 고기 싸오라고 하고, 방망이랑 볼도 갖고 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 방망이 들고 스윙을 시작했죠.

    - 프로야구 선수들은 주로 뭘 먹나요?

    고기를 많이 먹죠. 제가 연세대에 들어갔을 때 감독이 고기를 사주겠다고 해서 식당에 데리고 갔는데요. 그때 저 혼자 11인분을 먹은 기록이 있어요.

    - 제일 힘들었던 부상은 역시 교통사고였나요?

    네. 근데 그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몸값을 해야 해요. 팬들에게 서비스를 하기 위해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는데, 툭하면 어디가 아파서 몇 개월 쉬는 건 서비스 정신에서 빗나가는 거예요. 부상이라는 건 예방하는 수밖에 없거든요. 연봉을 많이 받는 만큼 자기 몸 관리를 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갖고 프로야구를 발전시키려면 약간의 희생도 감수해야 해요.

    -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은?

    83년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함께 차에 탔던 친구 부인은 사망했어요. 그 해에 우리가 정기리그에서 우승해서 MBC 청룡과 한국시리즈를 붙게 됐는데요. 해태 타이거즈도 처음 우승에 도전하는 거라 촌놈들의 끈질긴 팀워크를 발휘하자고 했어요. 결국 한국 시리즈에서 4승 1무로 승리하면서 제가 MVP가 됐는데요. 기자들 앞에서 MVP가 된 소감으로 친구 부인의 영전에 상을 바치겠다고 말했을 때 감격스러웠습니다.

    - 천적이었던 투수도 있었나요?

    사실 해태 타이거즈 3,4,5번 타자에겐 쉬운 투수가 없었습니다. 해태를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분들에겐 재미가 남달랐죠. 김일곤 선수의 도루, 김성한 선수의 안타, 그리고 저의 홈런 등. 사실 3,4,5번 타자의 활약이 거의 반에 가까운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었죠. 제일 어렵다면 선동렬 선수겠지만, 역시 한국 시리즈의 4승을 기록했던 최동원 선수의 기량이 최고였어요.

    - 투수와 타자가 서로 신경전도 하나요?

    소위 머리싸움이죠. 야구를 잘 하는 선수를 보면 경기 흐름을 빨리 읽습니다. 투수와 포수의 볼 배합이나 속도, 체인지업 등 한 타석 들어가면 벌써 두 타석 때는 다 읽어요. 저는 그런 걸 빨리 읽었어요.

    제일 재밌었던 건 삼성과의 경기였는데요. 이만수 선수가 저희 홈런 라이벌이었는데, 시끄러워서 도저히 타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타석에서 타임을 부르고 주심한테 "도저히 시끄러워서 경기가 안 되니까 말려 달라!"고 하면 심판도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했죠.(웃음)

    - 88년에 왜 은퇴하셨나요?

    힘이 모자라서 은퇴했던 건 아니에요. 한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었어요. 근데 김응룡 감독께서 ''지금 해태 타이거즈의 지도자가 마땅하지 않다, 지금 해태의 선수가 좋은데 너도 선수로 필요하다, 그러면 타격 코치 겸 타자를 하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어요. 그리고 1년 후 89년에 정식으로 은퇴하고 코치를 했죠.

    - 마지막 게임은?

    88년에 우리가 한화 이글스에 우승한 경기였어요. 사실 당시 세간에 좀 시끄러웠습니다. 일반 팬들의 적극적인 호응도 속에서 저의 은퇴 경기를 준비했었는데 구단이 말렸죠. 어떤 계산 때문에 그랬는지는 말하긴 어렵지만 내부적으로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박철순이나 윤동균, 장종훈 선수 등 그 다음 은퇴선수부터는 제 영향을 받아서 은퇴 경기를 화려하게 했어요.

    - 은퇴 경기 다음날 아침에 눈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결정을 조금 빨리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부산으로 시범경기에 코치 자격으로 갔는데요. 찬스가 오니까 감독이 "봉연이, 스윙 한 번 해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 은퇴했어요. 이젠 선수 두목이 아니고 코치 두목입니다."라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선수 생활을 하면서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86년에 석사를 마쳤는데요. 의외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낮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정경기를 다니면서도 영어 공부를 놓지 않았는데요. 내가 현역선수니까 이왕이면 이걸 이론에 접목시켜봐야겠다 싶어서 생리학 쪽을 택해서 석사 과정을 들어가게 됐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한 번도 운동장을 결장해본 적이 없는데요. 마지막 논문 발표식 때는 그쪽 시간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딱 한번 연습에 빠졌어요. 그랬더니 김응룡 감독이 "너 참 웃기는 놈이다, 프로야구에서 그만큼 인기도 있고, 감독도 할 텐데 복잡하게 공부는 왜 하냐?"고 하시더라고요.

    - 왜 굳이 공부를 하셨나요?

    공부를 하면서 왜 운동선수들이 술이나 담배, 문란한 사생활을 해선 안 되는지를 많이 터득했어요. 선수 운동 전과 후를 자연세포의 기능을 전부 테스트했는데요. 일반인보다 오히려 운동선수들이 에너지를 다 소모한 다음에 쉽게 감염되는 확률이 높습니다. 그만큼 에너지가 떨어져서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그럴 때 술이나 담배, 여자를 가까이 하면 감염률이 높은 거예요. 감기 바이러스조차 예방할 수 있는 힘이 없죠. 이럴 때 몸 관리를 잘 해줘야 선수 생명력이 오래 갑니다. 이런 부분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지금은 박사 과정에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나이가 들면 책으로 써볼 생각입니다.

    - 2001년부터 강단에 서기 시작하셨는데요. 처음엔 총장님이 상당히 걱정하셨다고요?

    2000년 11월에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가 되면서 김상환 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저는 팀을 떠났어요. 떠나면서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극동대학교의 유기일 총장을 만났습니다. 그때 제 친구가 총장님께 "이 친구가 그 와중에도 공부를 했으니까 강의 한 번 맡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그때 총장님은 좋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걱정을 많이 했대요. 과연 운동선수가 학생들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할까 싶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엔 정식교수가 아니라 겸임교수로 발탁이 됐는데요. 겸임교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게 됐어요. 일반 교양과목만 맡았는데 그중 골프가 인기과목 중 하나가 되면서 의외의 반응이 나오거든요. 운동하는 사람이 영어와 일본어도 할 줄 알고, 글 쓰는 것도 보통 솜씨도 아니고. 총장께서 저에게 어떻게 준비했냐고 묻기에 "어릴 때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때의 그 자부심이라는 것이 상당히 긍지를 갖게 해줬어요. 지금도 공부는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 첫 수업에서 "내가 김봉연이다."라고 했는데 학생들이 묵묵부답이었다고요?(웃음)

    67명의 학생이 수강신청을 했는데요. 저는 당연히 제 이름을 쓰면 알 줄 알았는데 전혀 무반응인 거예요. 그때부터 긴장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께 김봉연 교수에게 수업을 듣는다고 말해보라"고 했더니, 그 다음 주부터 싸인 공세에, 부모님들이 확인차 오시기도 하과. 그래서 일부러 제 연구실에 현역시절의 사진도 붙여놓곤 했죠.(웃음)

    - 골프는 언제부터 치셨나요?

    우리나라 권투 초대 챔피언이었던 김기수 씨가 제 동서인데요. 85년에 우연찮게 동서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찮게 골프채를 하나 받아왔어요. 그리고는 바로 기차를 타고 광주 집에 내려갔는데요. 광주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골프 얘기가 나와서 한번 가보자고 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는데 첫 테이프를 잘 끊었어요. 그랬더니 같이 간 친구들이 "김 선수, 몇 년 됐어?" 그러더라고요. 그날이 골프채를 잡은 첫날이었거든요. 야구선수이기 때문에 잘 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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