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 조승희 |
[이 편지는 ''''팩션(사실과 허구의 결합)''''임을 알려드립니다]
내 이름은 조승희. 1984년 1월 한국 서울에서 태어났어.
조승희
세 살 많은 누나가 있고, 우리 네 식구는 서울 창동의 작은 연립주택 반지하방에서 살았어.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일했는데, 짐작하다시피 벌이가 그리 넉넉지 않았지.
내가 8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정확히 내 나이 만큼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미국 정부로부터 입국 비자를 획득했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렇듯, 우리 또한 눈부신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버지니아 센터빌이란 곳에 정착하게 된 거야.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하루 12시간씩 세탁소 종업원으로 일했고, 같은 일을 하던 어머니는 우리 가족 모두가 의료보험 가입이 가능한 곳을 찾았고 결국 한 고등학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어. 그 뿐이었지.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
나는 처음부터 활달하거나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어. 난 수줍음이 많고 말 수가 적었지. 타인과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마음 속 말을 상대가 좋아하게끔 말하고, 또래들에게 인기를 끌 만한 취미나 재주 등을 한 가지쯤 갖는 것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잖아.
학창시절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어. 꿈처럼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이 더없이 절망스러웠지. 아이들은 날 부서져도 아쉬울 것 없는 시시한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 같았어. 그들은 내 침묵과 무표정을, 심지어 낮고 굵은 내 목소리마저 비웃었어.
족스(주로 부유층 출신인 미국 고등학교의 운동선수와 인기 많은 학생들)들은 내게 이유 없이 욕을 퍼붓고 때렸으며, 선생님의 질문에 내가 답을 찾는 동안 물건을 던지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어. 어떤 애는 내 코앞에 1달러를 들이대며 무슨 말이든 하면 그걸 준다고 했지.
2003년에 난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사진은 찍지 않았어.
그리곤 버지니아 공대에 입학했어. 1학년 땐 컴퓨터공학을 택했지. 고등학교 때 팀을 이뤄 과학대회에 나갔다 1등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백인 아이가 날 자랑스럽게 쳐다본 걸 기억해. 왜냐하면 내가 없었다면 우리팀이 1등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야. 밴드에도 가입해봤어. 트롬본을 맡았는데 오래하긴 힘들더군.
밴드 지휘자는 내게 높은 음을 연주할 것을 ''''경고''''했고, 난 그러지 않았거든. 그러자 그들은, 내가 숱하게 경험한 방식으로 날 밀어내기 시작했어. 매사가 그런 식이었어.
그래서 난 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비밀노트를 만들었고, 거기에 날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어. 한번은 우연히 노트를 떨어뜨렸는데, 그걸 본 한 아이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어.
2학년에 와서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꿨어. 난 무엇이든 공유하고 싶었거든. 시를 창작하는 동안 만큼은 난 해방의 기쁨을 느꼈어.
하지만 담당교수의 요청으로 난 시 창작 수업에서도 강제로 쫓겨났어.
만약 너라면 어땠겠니?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는데 수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것이 담당 교수의 직접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조롱과 동정이 섞인 시선을 뒤로 한 채 교실을 걸어 나왔다면 말이야.
그 후로 나를 일대일로 지도하겠다고 자청한 여교수에게 몇 번인가 강의를 받았지만, 난 성실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날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이거 한 가지는 기억해. 그녀는 내게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고, 내가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고백하자, ''''누군가에게 ''''안녕, 잘 지내?''''라고 말을 걸면 된다''''고 했어.
하지만 그것 역시 내겐 결코 쉽지 않았어.
그 후로 모든 게 엉망이 되기 시작했지. 마치 파도에 침범당한 모래성이 한순간에 우루루 무너지는 것처럼.
2005년 11월과 12월, 난 두 명의 여학생에 의해 고발당했어. 내가 그들을 스토킹 했다는 이유였지. 그들은 내가 그녀들에게 ''''불온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주장했고 또 내가 자신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학교 당국에 요청했어. 그러자 경찰들은 날 찾아와 ''''조신하게 있는 게 좋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지.
난 그날 밤 룸메이트의 메신저로 ''''난 자살할 수도 있어''''라고 말했는데, 그 일로 내 아버지와 기숙사 생활조교는 날 경찰에 신고했고, 그들은 날 정신병원(캐릴리온 세인트 알반스 행동건강센터)으로 데리고 갔어.
의사는 내가 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즉각적인 위험이 될 수 있기에 장기병원치료를 요한다고 진단했어.
그리고 얼마 후 법원은 내게 통원치료를 받도록 명령했지. 그러나 그 선고 이후 난 병원에 가지 않았으며,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끝으로 날 슬프게 만든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얘길 해줄께. 어머니는 우드브리지 지역의 한 목사에게 나를 치료해줄 것을 요청했어. 그들은 내 안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쫓아내야 한다''''고 조언했대. 난 그들이 의식을 실행하기 전 학교로 돌아 왔지만, 진정 그들이 날 도와줄 수 있었을까? |
캠퍼스
이 글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편지 형식을 빌어쓴 ''''팩션(사실과 허구의 결합)''''이다.
두 해 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하 버지니아 총기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사회는 한국에서 온 23살 청년 조승희에 대해 ''''비로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글 속의 모든 사건은 언론 보도와 해당사건 관련 저서들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을 토대로 했으며, 승희의 감정 묘사는 심리학자와 의사들의 정신 분석과 진단을 참고한 것이다.
실제로 조승희가 법원의 통원치료 명령을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를, 정신병 의사 마커스 랜트는 ''''바로 이 시점이 조승희가 부서지는 순간이다. 모두가 자기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때부터 편집증적 환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스페인 기자이자 소설가인 후안 고메스 후라도의 저서 ''''매드 무비(mad movie)'''' 참고)
필자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32명의 교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자신의 얼굴에 주저없이 두 발의 총을 쏴 자살한 가해자 조승희를 두둔하거나, 무뎌진 독자들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 한 가지 게임을 제안할 뿐이다.
◈''''What If Game''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버지니아 총기사건을 비롯해 각종 범죄와 천재지변 등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후유증 중에 ''''What If Game''이란 것이 있다.
''''만약 ~라면'''' 게임으로, 찰나의 순간에 더 참혹해지거나 빗겨갈 수 있었던 범죄순간을 떠올림으로써 살아남은 이들에게 공포와 죄책감 등을 증폭시키는 심각한 정신장애의 일종이다. 버지니아 총기사건 역시, 직접적인 피해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이웃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장애를 남겨주었다.
이 ''''게임''''을 우리의 일상에 적용해보는 것이다.[BestNocut_R]
조승희가 ''''괴물''''로 변하기 전 그가 단지 수줍음 많고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한, 외로운 꼬마였을 때 우리가 그를 만났다면?
낯선 이국땅, 텅 빈 농구장에서 홀로 공을 던지다 인기척이 나면 황급히 몸을 숨기던 소년인 그를 만났다면?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며 ''''Teach me how to speak/Teach me how to share/Teach me where to go(collective soul의 shine)''''와 같은 쓸쓸한 노래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듣던 그와 룸메이트가 됐다면?
내 주변으로 눈을 돌려(이것이 이 게임의 진정한 목적이다), 나약하고 가진 것 없고 어눌한 이를 ''다수 편''에 서서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 지, 함께 왕따를 당할까 잘못임을 알면서도 등돌려 혼자 걷는 이에게 돌은 던지고 있지 않은 지, 외로움과 고독에 홀로 병들어가는 ''''외톨이''''를 방치하고 있지 않은 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누구나 (조승희가)될 수 있다"
버지니아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조승희는 미국이란 문화권 안에서 교육받고 생활한 미국인이다. 그를 한국과 연결해서 (버지니아 총기사건을)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범죄의 이유는 개인과 사회 두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추정할 수 있겠지만 ''''범죄의 형태''''는 총기 소유를 허용하는 미국의 제도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누구나 (조승희처럼)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며 ''''이민자를 포함한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립감과 좌절, 압박 등은 한 개인에게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 인해 "형태만 다를 뿐 언제라도 비극적인 상황을 부를 수 있다''''고 말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 글은 조승희의 범죄를 그의 불행을 상기시킴으로써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을 내미는 데 미숙한, 외롭고 여린 ''''외톨이''''들을 향해 무심코 돌을 던지고 있을 지 모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글을 닫기에 앞서, 오는 4월 16일로 2주기를 맞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에서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전멸을 목표로 행해진 홀로코스트에서도 살아남아 스무 명의 학생의 목숨을 살리고 77살에 생을 마감한 리비우 리브레스쿠 교수와, 친구들의 시체 속에서 가만히 숨어 있었더라면 살았을, 그러나 조승희를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포기한 매튜 라포트를 포함해 ''''죽어야 할 이유''''라곤 우리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악행'' 외엔 특별할 것 없었을 32명의 희생자, 그리고 지독히 고독했을 조승희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