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양부모의 지속적인 학대를 받던 정인이가 췌장 등이 끊어져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것은 사망 당일 '별도의 사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왔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유성호 교수는 17일 오후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3부(이상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모 장모씨와 양부 안모씨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망에 이른) 마지막 사건이 따로 있었다고 본다"며 "(장씨가) 사망 가능성을 인식했다는 게 의학적 소견"이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정인이의 사망 원인을 들여다본 법의학 전문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유 교수는 앞서 검찰에 낸 소견서에서 "사망 3일~7일 전에도 복부 내 손상이 있었고, 사망 당일 강한 둔력이 가해져 장간막이 파열돼고 췌장이 절단돼, 600mL 급성 대량출혈이 발생해 정인이가 사망했다"고 분석했다.
검찰은 정인이 사망 당일 오전 8시 4분부터 9시 1분경까지 장씨가 촬영한 동영상을 증거로 제시했다. 영상 속에서 장씨는 정인이에게 여러 차례 '빨리 와'라고 말했고, 이에 정인이가 장씨를 향해 걸어왔다. 장씨는 정인이의 얼굴 정면을 영상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영상 속 정인이는 몇 차례 카메라를 응시했다.
장씨가 이 영상을 촬영한 뒤 정인이의 췌장이 끊어질 정도의 '특정 가해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법정에서 영상을 확인한 유 교수는 "(췌장 등이) 절단되면 혈액 등이 나와서 굉장히 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저렇게 걷기는 어렵다"며 "병리학적 소견상 다른 이벤트(사건)가 그 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16개월 된 입양 딸 정인 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양부모의 4차 공판이 열린 17일 오후 서울 양천구 남부지방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팻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유 교수는 "췌장 절단, 장간막 손상 등으로 봤을 때 한쪽 면에 (피해 아동이) 고정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며 "발로 밟는 경우가 가장 합당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간막 등이 파열될 수 있는 사례로는 누군가 발로 밟거나, 누워있는 사람을 의자 등의 물체로 찍는 경우를 언급했다.
정인이를 들어 올려 흔들다가 떨어뜨렸다거나, 심폐소생술(CPR)을 하다가 췌장 등이 끊어졌을 수 있다는 장씨 측 주장도 반박했다. 장씨는 앞선 조사에서 "정인이가 밥을 먹지 않아 들어 올려 흔들다가 가슴 수술을 한 부위의 통증으로 떨어뜨렸다"며 "정인이가 범보 의자에 등 부위를 부딪쳤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유 교수는 "해부학적 위치상 (이 같은 행위로) 췌장이 파열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며 "(장씨 주장대로라면) 척추 골절이 동반돼야 하는데, 없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장간막 등이) 파열되려면 CPR로 누르는 압력보다 강한 압력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유 교수는 장씨가 정인이의 사망 결과를 예견, 인식했을 뿐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할 '의사'가 있었다고 미뤄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재판부에 "도망갈 수도, 구호 조치를 할 수도 없는 너무 작은 아이가 여러 곳을 너무 많이 다쳤다. 아이의 신체 70% 이상이 혈액에 노출됐다"며 "치명적 손상이 반복적으로 여러 번 있었다면 '(장씨가) 사망 가능성을 인식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학적 소견"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양모 장씨는 살인·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아동학대치사)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며, 양부 안씨는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아동유기·방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다음 달 7일에는 부검 재감정을 한 가천대 법의학과 이정빈 교수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