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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용의 정보방] 일제의 최대 만행 '맹산학살'은 왜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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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정당)

    [안성용의 정보방] 일제의 최대 만행 '맹산학살'은 왜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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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고문에 항의하는 주민 54명 헌병대에 가두고 사살
    29명 숨진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나
    분단으로 북쪽에서의 3.1운동 제대로 조명 안돼

    ■ 방송 : CBS라디오 <임미현의 아침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00~07:30)
    ■ 진행 : 임미현 앵커
    ■ 코너 : 안성용 기자의 <정보방 -정치를 보는 방법>


    ◇ 임미현> 안성용 기자의 정치를 보는 방법, 정보방 시간입니다. 안 기자 오늘은 어떤 소식입니까?

    ◈ 안성용> 지난 1일은 3.1절 100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평안남도 맹산에서 벌어진 참극이었습니다.

    먼저 이부분 잠깐 듣고 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한형기자
    <인서트> 문재인 대통령 "최대 참극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벌어졌습니다. 3월 10일, 체포, 구금된 교사의 석방을 요구하러 간 주민 54명을 일제는 헌병분견소 안에서 학살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3.1운동은 유관순 열사, 탑골공원 만세운동,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같은 남쪽에 한정된 것입니다. 남쪽에서의 3.1 운동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서 일어난 3.1운동 전체를 알아야 온전하게 3.1 정신을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9년 3월 10일 맹산에서 일제가 저지른 학살 만행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맹산 학살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임미현> 일제의 학살 만행하면 제암리 학살사건을 떠올리는데 학살 사건이 또 있었어요

    ◈ 안성용> 맞습니다. 방송을 준비하면서 일제가 맹산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아는지 동료들에게 물어봤는데 대부분 몰랐습니다. 물론 저도 얼마전만해도 어디서 한번 들어 본 정도였습니다.

    1919년 3월 6일에 평안남도 맹산에도 독립선언서가 전달됩니다. 이에 맹산의 천도교 교구와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50여명이 호응해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강제해산 됩니다.

    ◇ 임미현> 3월 6일이면 서울보다 닷새 늦은 거네요?


    ◈ 안성용> 네, 우리가 잘 아는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4월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맹산의 만세시위는 상당히 빠른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맹산에서는 3월 6일 만세운동이 강제 해산된 뒤에도 각지에서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일제는 3월 10일에 천도교인 1명을 만세시위 주동자라며 헌병 주재소에 잡아 두고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격분한 군중 100여명이 헌병주재소로 가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항의하던 군중들을 모두 뜰 안에 들어오게 하고 문을 잠근 뒤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5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은 부상을 입은 후 도망가다 사망했고, 13명이 부상했습니다.

    ◇ 임미현> 제암리 학살사건과 비슷하군요?

    2일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화성시 제공)
    ◈ 안성용> 아주 비슷합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4월 15일에 한 무리의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와서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약 30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은 사건입니다. 이 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 놓으며 아기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군경은 아기마저 잔혹하게 찔러 죽였습니다.

    이 만행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본군을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에 타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무고한 양민 29명이 희생됐습니다.

    ◇ 임미현> 100년전의 일이지만 일제의 만행에 치가 떨리네요? 평남 맹산에서 희생된 분들이 제암리때보다 두 배나 많은 것도 눈에 띄네요?

    ◈ 안성용> 맹산학살 사건의 경우 연행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주민들이 몰려가니까 헌병 분견소장은 분견소 구내로 들어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런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주민들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분견소 구내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에 헌병들은 하나 뿐인 분견소의 문을 잠그고 발포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 3권 3.1운동>에는 "일본군은 그들을 헌병대 안마당으로 끌어들여 대문을 닫아 가두어 놓고, 높은 곳에 올라가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다시 마당에 내려가 아직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칼로 찔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 임미현> 계획적이고 야만적이네요?

    ◈ 안성용> 이날 일본군이 발사한 실탄은 총 76발로서 이 총탄에 의하여 5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사격이 얼마나 정확한 조준사격이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맹산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후에도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나갔고, 밤에는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헌병과 경찰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맹산에서 3.1운동에 의한 사망자는 253명, 부상자는 25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 임미현> 어째서 우리는 이런 민족적 비극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까요?

    ◈ 안성용> 분단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분단으로 인해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고, 북쪽에서 일어난 3.1운동도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습니다. 3·1운동 첫날 시위가 있었던 7곳 가운데 서울을 제외하고 6곳이 모두 북녘 땅입니다. 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원산 등입니다.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은 서울보다도 규모가 더 컸고 더 오래 지속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3.1운동 하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태화관, 탑골공원, 유관순 열사, 천안 아우내장터 정도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 임미현>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앙상하게 뼈대만 아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안성용>네. 뼈대라도 제대로 알면 좋은데 제대로 모르니까 그 것도 문제인 것 같습니다.

    ◇ 임미현> 남북이 3.1운동을 같이 기념하고, 같이 기억하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 안성용>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평양정상회담 때 3.1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남북이 같이 하기로 했었습니다만 북한이 북미정상회담에 몰두하다보니 잘 안됐습니다. 내년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3.1 운동을 기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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