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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100년후에도 인정안돼'…양양만세 주도한 '이석범' 선생

[지역에서도 들끓은 만세운동③] 이념떠나 '항일운동' 대의로 규합

버선에 독립선언서 숨겨 양양으로 가져와
양양서 6일 동안 12명 사망, 70여 명 부상

이석범 선생.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양양 만세운동은 지역에서 일어난 기미 독립 만세운동 중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설초(雪樵) 이석범 선생이 있었다.

1919년 4월 양양지역에서 울려 펴진 만세운동을 기록한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사'에서 원로 학자들도 "극단적이라는 공통성이 보수든 혁신이든 항일운동이라는 공동목표에 집약돼 치열한 3.1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미년(1919년) 3월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며 민족감정이 격앙되고 있었다. 당시 양양지역 유림세력의 대표였던 이석범 선생은 61세의 나이로 유림 10여 명과 함께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했다.

이석범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삼엄한 검문검색 속에서 소변을 보는 척 하다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기는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귀향한다.

이후 동생 이국범과 두 아들, 그리고 임천리 문중의 이교완, 이교정을 비롯해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유림, 양양보통학교 졸업생, 양양감리교회 신문화 세력 등과 함께 장날이었던 4월 4일 양양 만세운동을 모의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독립선언서를 몰래 들여 온 여성운동가 조화벽 지사, 양양감리교회 청년부 김필선 선생 등과 규합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들은 서로간 이념을 달리했지만, 항일운동이라는 대의 아래 뜻을 모았다.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에 있는 3·1운동 유적비.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하지만 만세운동 계획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세운동을 위해 수일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어서 만들 던 중 만세운동 하루 전인 4월 3일 당시 군수였던 이동혁 등에 발각된다. 결국 이석범 선생 등 주도자 22명은 대사를 하루 앞두고 체포됐으며, 인쇄기와 태극기 374매도 압수된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함홍기 열사를 포함한 군중들은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 안에서 이석범 선생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하던 함흥기 열사가 양팔이 잘린 채 숨지자 '양양 3·1 만세운동'은 그 어느곳보다 활활 타올랐다.

실제 양양지역은 임천리와 물치, 기사문 등 양양지역 6개면 82개 동리에서 남녀노소 6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4~9일까지 6일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12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구금이나 수형자 172명,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태형을 받으면서 지역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만세운동 당시 이석범 선생이 주로 활동했던 양양군 임천리 마을. (사진=유선희 기자)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석범 선생은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11월 풀려났으며, 동생 이국범과 두 아들도 투옥돼 혹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이석범 선생은 지난 1913년 '쌍문서숙'을 설립해 후진 양성과 항일 애국함양에 전념했다. 이어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에 참례하고, 1927년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주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인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양양지회의 초대회장을 맡는 등 조국의 독립에 여생을 바쳤다.

이처럼 양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양양 유림의 대표 인물로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지만, 그의 공헌은 100년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석범 선생의 동생 이국범 지사의 훈장증.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만세운동으로 당시 실형을 살았던 이석범 선생의 장남 이재훈과 동생 이국범에게는 지난 1990년과 2005년에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하지만 만세운동 이후 구금은 됐지만 실형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만세운동 직전까지 도촌면장을 지냈던 이석범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양양향토문화원 김양식 연구원은 "각종 기록과 증언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안타깝다"며 "지난해 8월 다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만큼 이번에는 이석범 선생님의 항일정신과 헌신이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1919년 3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들끓은 기미 독립 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강원영동CBS는 지역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저평가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이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연속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체포자 석방하라"…일본 경찰서장에 맞선 함홍기 열사
② 개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 행동하는 여성운동가 조화벽 지사
③'100년이 지나도 인정 못받아'…양양만세 주도했던 '이석범' 선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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