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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국가' 내팽개친 '정권' 안보, 나라꼴을 우습게 만들다

    역사학자 한명기에게 듣는 '남한산성' 밖 병자호란 이야기 <하>

    엄동설한이 몰아친 1636년 12월 조선에 청나라 대군이 침입합니다. 47일 만인 이듬해 1월 조선의 패배로 끝난 '병자호란'은, 영화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등에서도 다뤄졌듯이 당대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죠. 병자호란 연구의 권위자로 첫손에 꼽히는 역사학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들려준 '남한산성' 밖의 병자호란,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무려 7년에 걸쳐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은 47일 만의 속전속결 참극(관련기사☞47일간의 '생지옥'…여자는 한낱 '재물'에 불과했다)으로 끝이 났다. 한명기 교수는 23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을 속전속결로 만든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를 따져보면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며 말을 이어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한양까지 오는데 17일이 걸렸어요. 그 거리는 약 428㎞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500㎞가 조금 넘었는데, 청나라 군대 선발대가 5일 만에 주파하죠. 이는 청군의 기동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이 변변한 방어를 못했던 원인이 큽니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 발발 9년 전인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인조 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해 항전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병자호란 때도 강화도로 가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다"고 전했다.

    "청군이 빨리 내려오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황해도에서 청군을 막으라고 배치했던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초전에 많은 과오를 저지른 탓이 컸습니다. '병자록' 등을 보면 김자점은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를 제때 서울로 전달하지 않았어요. 겨울철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판단에 기초해 청군의 움직임을 간과한 거죠."

    그는 "김자점은 황해도 황주 정방산성에서 청군에게 패했다. 이럴 경우 보통 다른 장소로 이동해 적을 막아야 하는데, 그는 싸우지 않고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며 "쉽게 말하면 조선의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요즘으로 치면 1번 국도상의 방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던 셈"이라고 지적했다.

    ◇ "명나라 승인 못 얻은 인조, '낙동강 오리알' 될까 두려워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제대로 된 방어선 한 번 구축하지 못한 채 한양에 이르는 길을 청군에게 열어 준 조선군의 허술한 방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는 인조 정권의 모순이 집약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한 교수의 진단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 자리에 있던 인조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인조가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할 때는 '광해군 정권에 문제가 많았으니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넘쳤다고 볼 수 있다"며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항복했던 인조 정권의 잘못된 출발은 이미 '이괄의 난' 때 싹수가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1624년 1월 이괄의 난이 터지는데, 인조가 정권을 잡은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죠. 이괄은 인조 반정의 공신이었지만, 다른 고위 공신들과 논공행상(論功行賞·공적의 크고 작음 따위를 논의해 그에 알맞은 상을 줌)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은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서울까지 점령 당한 사태였어요. 이로 인해 인조는 공주로 피신합니다."

    한 교수는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그간 인조 정권이 구상했던, 광해군 정권과는 전혀 다른 뭔가를 보여주겠다던 개혁안은 물거품이 된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괄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불이 나면서 개혁 사업에 필요했던 서류가 몽땅 타버린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 영향이 컸습니다. 이괄이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던 1624년 1월은 인조가 아직 명나라로부터 새로운 국왕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죠."

    그는 "공주로 피신했던 인조와 반정 공신들 입장에서는 만약 이괄이 명나라에 잘 보여 흥안군을 왕으로 승인받으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셈이었으니, 커다란 위기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 "인조정권, 명나라에 잘 보이려 엄청난 재정 부담까지 감수"

    영화 '최종병기 활'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앞서 광해군 정권 시절이던 1621년, 청나라가 만주 지역을 장악하면서 조선과 명나라를 잇는 육로가 끊긴다. 이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조선 압록강변에 주둔하면서 청나라를 자극했고, 명나라가 모문룡을 적극 지원하자 조선은 전쟁터가 될 위기에 놓인다. 이때 광해군은 모문룡을 설득해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섬인 가도로 몰아낸다.

    한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은 이런 식으로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위험을 더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광해군이 폐위된 뒤 인조는 모문룡을 너무 가까이 했다. 정묘호란은 청나라가 눈엣가시 같던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명나라 모문룡은 당대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입니다. 명나라를 대리해 조선을 견제했던 에이전트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모문룡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에게 협조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인조 정권이 명나라 쪽으로 훨씬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그는 "'코가 뀄다'고 할 정도로 인조는 모문룡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를 통해 명나라 조정에 잘 보이기 위해 엄청난 재정 부담까지 감수한다"며 "어떤 해에는 모문룡에게 보내는 양곡의 양이 세입의 3분의 1에 달할 만큼, 인조는 친명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진다"고 설명했다.

    "이괄의 난을 겪은 뒤부터 인조와 정권을 잡은 공신들의 태도는 '빼앗길 뻔했던 권력을 어떻게 천년만년 유지할 것이냐'로 변질됩니다. 그것이 모든 관심의 우선순위가 된 거죠. 한마디로 '정권 안보'에 올인하다 보니 '국가 안보'를 챙길 여유가 사라진 셈이죠. 요즘으로 치면 사찰, 그때 말로는 '기찰'이라고 했는데, 반대파의 군사훈련 등에 대한 감시가 이어집니다."

    ◇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만의 대결이 아닌 국제전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명나라로 확실하게 기울어진 인조 정권의 태도는 당대 격변기에 놓인 국제 정세를 객관적으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 교수는 "인조와 반정 공신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명의 책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며 "쉽게 얘기하면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전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든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그렇게 인조 정권의 길은 개혁 구상과는 정반대에 있는 권력 유지 방향으로 완전히 틀어진다"며 "그렇게 정권이 명나라에 속절 없이 끌려다니게 됐으니, 병자호란은 이미 예견됐던 참극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인조 정권에게는 민초들의 삶 역시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한 교수는 "사실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 이후 무력감에 바탕을 둔 권력유지 등에 매몰돼 민생을 돌보지 않았다"며 "광해군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나중에 대동법을 충청도, 전라도까지 확대 실시한 것은 인정하지만, 기록을 보면 인조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 하는 짓은 광해군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나옵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와요."

    그는 "인조 정권 공신들은 광해군 정권의 핵심들을 쫓아내면서 '저들이 탐욕에 눈 멀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재산을 강탈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정작 똑같은 행태를 반복했다"며 인조 정권의 뚜렷한 한계를 지목했다.

    특히 한 교수는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만의 대결이 아니었다"고 역설했다.

    "병자호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는 물론 가도, 심지어 일본에까지 여파를 미치는 국제적인 전쟁으로 봐야 합니다. 자칫 내부로만 시야가 매몰돼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거대한 외부 변화상을 놓치게 되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 "'이이제이' 경계해야…한반도 전쟁 나는 순간 우리 손 떠나게 될 가능성 높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처지는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진단이다.

    "중국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장하면서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갈수록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 '경제적으로는 중국'이라는 단단한 구도 아래 놓일 수밖에 없어요. 이번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로 이러한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죠."

    그는 "사드 사태의 수업료를 바탕으로 거대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현실화 될 때를 대비해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전망 등을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논의할 시점이 왔다"며 분석을 이어갔다.

    "한국 사회는 북핵 문제 이후로 내부 분열이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정치권을 포함해 사회적으로 분열·갈등을 통합해 대외적으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러한 지혜를 모으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특히나 남북 분단 상태에서 내부 분열이 심해 보이면 강대국에게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를 당하기 십상이니까요."

    한 교수는 "내부 통합을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지는 사실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문제"라면서도 "정치권이 앞장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가 늘 강조해 왔던 것인데, 다른 사람 이야기에 진중하게 귀기울이면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협과 소통의 훈련을 어릴 때부터 기르도록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른 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쟁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목소리에 대해 우려하는 점이 있나'라는 물음에 그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 손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우리 운명을 우리가 개척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외교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 교수는 특히 "어느 누구도 현재 상황에 대해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주변 강대국과 달리 일정한 지렛대를 갖고 있지 못한 한국은 대단히 전략적이어야 한다"며 "전력적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부 통합이 선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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