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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소설 '릴리트'…36편 단편에 담긴 인간성



책/학술

    프리모 레비 소설 '릴리트'…36편 단편에 담긴 인간성

    프리모 레비 장편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의 소설 '릴리트'는 총 3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36편의 짧은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은 ‘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 ‘현재’로 모두 시간을 의미하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표현하는 시간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다. 왜 레비는 이 소설의 들어가는 문을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들로 썼을까? 그리고 왜 과거, 현재, 미래 순서가 아닐까? 시제 앞에 ‘가까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걸까? 레비가 이러한 시간 인식을 전면에 드러낸 이유는 각 부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다소 쉽게 찾을 수 있다.

    1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다룬다. 그곳에서의 지독한 고통과 처참함,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이것이 인간인가'의 로렌초와 엘리야, '휴전'의 체사레를 다시 소환해 그들의 삶을 좀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은 레비에게 ‘지나간’ 저 멀리에 있는 과거가 아니다. 언제든 상기하고 언제든 새로 쓰일 수 있는, 현재와 밀착해 있는 시간인 것이다. 제목을 ‘가까운’ 과거라고 붙인 이유 역시 독자들에게 아우슈비츠가 오래전에 일어난 것이 아닌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2부는 현재가 아닌 ‘가까운 미래’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환상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이종교배’가 가능할 법한 미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보인다. 3부 현재는 여기에는 1부와 2부에서 다룬 이야기들이 혼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씨앗을 품는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레비에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분절되어 나타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릴리트'에서 가장 주목해볼 만한 부분은 레비의 ‘경계 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는 레비가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이는 소재부터 글쓰기 방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령「릴리트」에서 '릴리트'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대신화 속 인물로, 하와 이전에 창조된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아담의 짝으로 창조됐으나 결국은 신의 저주를 받고 끝없이 변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의 틀을 교란시키는 존재이자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틀을 깨는 방식은 글쓰기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소용돌이치는 열기」에서는 ‘팰린드롬’이라는, 문장이나 구절을 거꾸로 읽었을 때도 똑같은 문자열을 이루는 언어유희를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의 가치와 유의미함을 상기시킨다. 이외에도 동물과 식물 간의 이종교배로 탄생한 인물이 등장하는「이종교배」, 화학물질인 탄탈럼이 인간의 불행을 없애줄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보여주는 「탄탈럼」과 같은 작품도 있다.

    “교란된 자연이 조화로운 질서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이상하면서도 놀라웠다. 서로 다른 종들 사이의 수태 가능성과 함께 그러한 욕망이 태어났다. 어떤 때는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욕망으로, 어떤 때는 불가능한 욕망으로 또 어떤 때는 행복한 욕망으로 나타났다. 마치 그녀의 욕망처럼. 아니면 갈매기들에게 몰두했던 그라지엘라의 욕망처럼 말이다.”(160쪽)

    “‘그렇다. 나 역시 악습을 가지고 있다. 술도 안 마시고 놀 줄도 모르며 담배도 거의 피우지
    않지만 나 또한 악습이 있다. 다만 다른 많은 사람의 악습보다 덜 파괴적일 뿐이다. 그것은 ‘거꾸로 읽기’라는 악습이다. 난 마약을 하지 않지만 다음 문장을 거꾸로 써보겠다. Eroina motore in Italia[이탈리아에서 자동차로 파는 마약]를 뒤집으면, Ai latini erotomani or ?[고대 로마인들은 호색한이거나 그렇다]가 된다. 훌륭하다. 운율을 갖춘 두 개의 십 음절 문장. 게다가 전혀 엉터리 같지 않다.’”(165쪽)

    레비는 전작에서부터 끈질기게 인간과 인간성을 자신의 글쓰기의 화두로 삼아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선악은 어떻게 내재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또한 인간은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가?와 같은 인간 본성의 문제에 계속 천착해왔던 것이다.

    '릴리트'에서도 이러한 레비의 고민은 꾸준히 이어진다. 특히 1부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제목에서부터 이름이 등장하거니와 인간에 내재된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인간을 혐오하거나 가치판단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더 깊게 이해해보기 위한 레비의 치열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인간성에 대해 끈질긴 성찰 끝에 나왔을 법한 문장들이 이 책에 다수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신자도 아니었고 복음에 관해 많이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내게 말해주었다. 거기서 그가 도와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 말고도 이탈리아인들과 다른 외국인들까지 돌봐주었지만 그 사실을 내게는 비밀에 부치는 게 좋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허영심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다.”(108쪽)

    “우리 역시 룸코프스키처럼 우리의 본질적 나약함을 잊을 정도로 권력과 재물에 현혹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게토에 있고, 게토는 경계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그 경계의 바깥에는 죽음의 시신들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122쪽)

    프리모 레비 지음 | 한리나 옮김 | 돌베개 | 347쪽 | 13,000원

     

    프리모 레비의 장편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저자 자신이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 성격을 지니지 않는 ‘첫’ 소설이라고 밝힌 작품이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이다.

    이 소설 역시 주요 등장인물이 유대인이며 홀로코스트와 나치에 대한 소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저서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비가 친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에 상상력이 더해 스토리를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의 책과 분명히 결을 달리한다. 또한 나치에 수동적으로 당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해나가는 유대인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2009년 국내에 영역판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번역은 이현경이 이탈리아판으로 재번역한 것이다. 단문 중심의 간결한 글쓰기가 주를 이루는 이 작품의 문체를 살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레비가 오래전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탄생했다. 레비의 친구는 1945년 밀라노의 난민지원 사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이탈리아에 도착한 유격부대원들을 만나게 된다. 나치가 그토록 없애버리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레비는 친구를 통해 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소설화하기로 마음먹는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와 대항하며 싸웠던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유격전을 비롯해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밀라노로 도착하는 그들의 긴 여정을 소설로 담아낸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작품 속 시간과 장소는 (실제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라고 한다. 유격부대원들은 독일군에 대항해 싸웠으며, 소비에트나 폴란드 정규군에 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여러 부대를 떠돌기도 했고, 숨어 지내며 오랫동안 살아남기도 했다. 또한 나치를 피해 탈출해 유격부대원으로 활동했더라도 집이 있어 돌아갈 곳이 있는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 돌아갈 집이 없는 유대인들 간에 심리적인 갈등이 나타나는 일도 벌어졌다. 고향과 가정이 있는 자와 잃은 자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는 이 작품에서 ‘유대인’으로 통칭할 수 없는 각 개별적인 상황들을 소환하며 개별 유대인들의 삶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나치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오기까지 유대인들이 겪은 기쁨과 고뇌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 수용소 문학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유대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멘델이 모스크바 출신의 낙하산병 레오니드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소설 속 멘델이 온화하고 단호한 사람이라면, 레오니드는 우울하고 고집스러운 성향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짧지 않은 동행은 쉽지가 않다. 둘은 어렵사리 게달라가 지휘하는 유대인 유격부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지만 이후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과정마다 사람들 간에 생기는 다양한 감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개별 인물들을 인생과 만나면서 전개되는 상황을 보다 보면 독자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슬픔, 사랑, 두려움, 억울함, 분노, 기쁨 등.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539쪽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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