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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130주년] 숨은 밀알을 찾아서..인천의 스데반 노병일



종교

    [선교130주년] 숨은 밀알을 찾아서..인천의 스데반 노병일

    [앵커]

    기독교 선교130주년을 맞아 복음 전파를 위한 밀알이 됐던 숨은 인물들을 찾아보고, 선교 초기 선교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포교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시기에 복음을 전하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인천의 스데반으로 불리우는 노병일 전도사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노병일 전도사는 130년 전 스크랜턴 선교사가 현재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선교를 시작할 당시 복음을 접했습니다.

    교육자였던 아내와 함께 누구보다 복음 전파에 열정적이었던 노병일은 당시 개항장이던 제물포 선교를 위해 1889년에 전도인으로 파송됐습니다.

    스크랜턴은 현재의 인천시 중구 경동 싸리재 인근에 두 채의 오두막을 짓고, 노병일 전도사에게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인터뷰] 김종설 권사 / 상동교회 민족교회연구소 사무구장
    “존스선교사가 온 다음 내리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 가장 유능한 현지 전도사인 노병일 전도사를 스카우트해서 가게 되죠.”

    밤낮없이 복음을 전한 노병일 전도사는 1890년 한국인 최초로 6칸 예배당을 짓고, 한국인 최초 목회자인 김기범 목사 안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등 초창기 인천지역 선교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인터뷰] 박승일 목사 / 제물포문화선교사업위원회 사무국장
    “노병일 전도자를 통해서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는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토착화 신앙, 토착화 목회의 첫 출발의 기틀이 되었다고 역사적인 의미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노병일 전도사가 활동한 당시에는 1888년 4월에 내려진 포교금지령이 유효한 상태였기 때문에 핍박을 불러왔습니다.

    관원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부각됐던 노병일 전도사는 전도 금지 명령에도 불응하고 장터 등에서 성경을 팔고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노병일 전도사는 1890년 어느 날 시장에 모인 이들에게 전도를 하다가 관원들에게 뭇매를 맞았고,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서울 시병원, 현재 상동교회에서 치료도중 죽음을 맞았습니다.

    당시 나이는 30대 초반, 노병일 전도사는 복음의 밀알이 됐지만, 변변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당시 선교보고서에서 노병일 전도사의 죽음은 제물포 선교의 크나큰 손실이라며 애도했습니다.

    선교초기 인천지역 선교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노병일 전도사는 인천의 스데반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취재] 정용현
    [영상편집] 서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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