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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찬 씨(41)는 태어날 때부터 잘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나마 청력이 좀 더 늦게 약해져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점자 단말기나 손가락 점자(점화)의 도움 없이 그와 대화하려면 주위의 모든 소리를 죽이고 그의 귓가에 입을 갖다댄 뒤 큰소리로 천천히 말해야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했다. 마치 광활한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미아와 같았다. 하지만 역시 한없이 외로웠던, 척추장애가 있는 아내 순호 씨(49)를 만나고나서 그는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만약 ''원래 한 몸이었다 분리된 인간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두 사람은 자신의 반쪽을 정확히 찾았다.
바로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이유다. 10대 때 처음 품었던 문학의 꿈도 되살아났다. 국내 시청각장애인들이 처한 문제들을 개선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감성 멜로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이승준 감독)을 통해 예쁘게 사는 모습이 소개된 조영찬 김순호 부부를 만났다.
"태초에 어둠과 적막이 있었다. 어둠과 적막은 신과 함께 있었고 ''나''가 나타나자 ''나''에게로 왔다"(영찬 시의 자작시) 지난 1998년 5월 결혼한 두 사람은 올해로 결혼 15년차를 맞았다. 싫증이 났어도 몇번은 났을 시간이다. 하지만 영찬씨는 "시간이 갈수록 사랑이 진해진다"고 말한다.
행복한 결혼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저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진정한 사랑은 결혼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연애할 때는 내가 저 사람을 굉장히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결혼해 살아보니 내 사랑이 미숙하고 부족하더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좀 더 성숙해져서 아내를 잘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결혼 초기에는 부부싸움도 했나? 사람은 정말 사랑한다면 싸움이 있어야 한다. 싸움이 없으면 무관심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걸로 싸웠다. 이제는 거의 안하는데 초기만 해도 내가 보이지 않아 물건 등을 차고 다니면 아내가 잔소리를 했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닌데 왜 이해를 못해주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충고 한마디 한마디를 배움의 기회를 삼는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부부수업이 됐다.
아내의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아내는 다른 아내와 달리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늘 나와 함께 하면서 통역도 해야 한다.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청각장애인과 이렇게 담담하게 또 눈살 찌푸리지 않고 즐겁게 살아주는게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아내가 더 크게 느껴진다. 작은 체구의 아내지만 그 속에는 거인이 숨어있다. 사랑의 거인이...
한 여름 뜨거운 라면을 먹으면서 시작된 사랑이다. 1997년 7월 8일이다. 영화에 나오는 후배 흥신과 함께 아내의 자취방에 가서 라면을 대접받았다. 그 날을 라면 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라면을 먹고 있다.
순호 씨는 영찬 씨를 어떻게 초대하게 됐나? 대전의 한 장애인선교회에서 어느 날 단체로 연극관람을 갔다. 돌아오던 길에 나, 영찬 씨, 후배 흥신이 함께 차에 내렸다. 저녁 무렵이라 식사를 했는지 물었고 안먹었다고 해서 초대를 했다. 유난히 더웠는데 선풍기도 없이 뜨거운 라면을 먹고 나니 두 사람의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됐다. 씻을 곳도 없던 선교회로 두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기가 안쓰러워 등물을 해줬다. 전 그냥 시골에서 하던 대로 해준건데 그때 마음이 많이 외로웠는지 두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잊지 못했다.
순호 씨가 특히 결혼 결심이 쉽지 않았을 텐데 영찬 씨는 자신과 결혼하면 고생길로 접어든다고 정말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막상 제가 결혼을 망설인 이유는 영찬 씨가 재능이 많은데 현명한 여자를 만나서 내조를 받으면 참 훌륭한 사람이 될 텐데 제가 부족해서 내조를 잘할지 자신이 없었다.
영찬/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살길을 책임져주실거다, 같이 잘해보자''고 프러포즈했다.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하여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것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하여 잠시 귀를 닫고 있는 거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하여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영찬 씨의 자작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된 시가 주옥같다. 시집을 출간해도 될 정도다. 벌써부터 제안이 들어오는데 아직은 시집을 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시뿐만 아니라 소설, 자서전도 내고 싶다. 시간나는대로 공부해서 준비가 되l면 출간하려고 한다.
언제부터 글을 썼나? 10대부터 작가를 꿈꿨다. 귀라도 들리면 문예창작과라도 가고 싶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 등과 달리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스템이 전무하다. 그래서 점차책만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35살에 처음으로 점자단말기를 접했다. 한대에 500만원이라 개인적으로 살수는 없었다. 정부에서 1년에 50대씩 점자단말기를 제공하는데 내가 받았을 때 경쟁률이 100대 1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수다. 여하튼 점자단말기로 자유롭게 책을 읽게 되면서 한동안 죽어있던 문학의 꿈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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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시를 써준 적도 있나? 없다. 연애편지를 쓰게 되면 과장하게 되고 허풍이 들어가 뻥튀기가 된다. 내 사랑을 뻥튀기로 만들 수 없다. 난 내 삶으로 살아있는 연애편지를 쓰고 있다. 영화를 촬영한 것도 일종의 아내를 위한 연애편지다.
이승준 감독의 말로는 3번 고사한 뒤 촬영을 허락했다. 마음을 바꾼 계기가 있었나? 지난 2006년 8월 우연한 기회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동양의 헬렌 켈러로 평가받는 시청각장애인 후쿠시마 사토시 도쿄대 교수가 주최하는 행사다. 그분이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언론매체와 접촉하는 게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영찬 씨가 대학 입학을 결심한 것도 시청각장애인대회에 참석하고 나서부터다. 거의 방치 수준인 국내와 달리 적절한 교육이 지원되는 일본의 현실에 큰 자극을 받았다. 현재 나사렛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영찬 씨는 이 대학에서 신학과 사회복지학을 복수 전공했다. 아내와 동료들이 점화나 점자단말기로 강의 내용을 전달해준 덕분이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되면 한국의 헬렌 컬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갈고 닦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미국 가서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이나 복지제도를 배우고 싶다. 돌아와서 그걸 실현하고 싶다. 그래서 미국유학이 꿈이다.
순호 씨의 꿈은 무엇인가? 영찬 씨의 꿈이 제꿈이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 등을 설립하고 싶다. 가끔은 몸이 힘들어 꾀병이 나기도 하지만 조금 쉬면 회복된다.
◈ 감성 멜로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은?
마치 손가락을 건반삼아 피아노를 치듯 점화로 느릿느릿 소통하면서 함께 형광등을 갈고 학교에 가고 또 겨울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등 부부의 평범한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감성 멜로 다큐멘터리. 지난 22일 국내 개봉에 앞서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부문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서로를 아끼면서 그림처럼 살아가는 두 부부의 모습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 시각과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영찬씨의 섬세한 감성과 세상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상상 이상의 감동을 전한다. [BestNocut_R]
사회 각지에서 앞다퉈 영화를 보는 분위기로 관람평은 호평 일색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진짜 시청각장애인은 어쩌면 우리일지도 모른다. 선량한 두 사람의 눈을 통해서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다"고 감탄했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은 "오랜만에 사랑을 느끼게 했다"고 전했다.
강원래와 김송 부부는 "맑고 순수하고 섬세한 영혼을 보는 기분"이라고 감동했다. 일반 관객의 반응 또한 뜨겁다. 한 해외 관객은 "스스로의 삶과 사랑을 돌아보게 만드는 러브스토리", 한 국내 네티즌은 "그저 벅차서..정말..참..좋더라"라고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