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18일 서울 명동 거리의 한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되어 있다. 전날(17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넘어서면서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류영주 기자정부가 환율 상승세에 제동을 걸고 나섰지만 시장의 불안감이 여전한 가운데, 한국은행의 금리 결정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환율 상승세가 멈출 줄 모르면서 한은이 부동산 시장을 자극할까 꽁꽁 감춰뒀던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들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
한은은 25일 발표한 '2026년 통화신용정책 운영 방향' 보고서를 통해 향후 금리 운용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은은 보고서에서 "기준금리는 향후 물가·성장 흐름 및 전망 경로상의 불확실성, 금융안정 측면의 리스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추가 인하 여부 및 시기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금리 인하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지만, 대내외 경제 여건을 면밀히 살피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은이 내년에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조정할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통화정책방향 회의는 1월 15일 열릴 예정이다.
치솟는 연말 환율에 정부 전방위 방어에도…시장 불안은 여전
현재 한국 경제의 최대 걱정거리로 부상한 환율 문제에 정부는 이미 대응 수위를 한껏 높였다.
성탄절 하루 전날인 지난 24일, 외환시장이 열린 직후 외환당국은 "원화의 과도한 약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종합적인 정책 실행 능력'을 확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해외주식을 팔고 국내로 돈을 돌려 장기투자하는 '서학개미' 투자자들에게는 양도소득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해주고,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받은 배당금을 국내로 들여오도록 세부담을 없애는 등 강도 높은 패키지 대책을 내놓았다.
여기에 더해 시장에서는 정부가 보유하던 달러를 직접 매도해 환율 상승을 억눌렀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당시 장중 환율 흐름상 당국이 수십억 달러를 시장에 출회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기업 및 금융사의 내년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기준인 연말 종가를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서둘러 개입했지만, 환율이 급등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오히려 정부의 개입 여력이 12월 연말에 집중돼 상당 부분 소진됐다면, 오히려 환율이 더 오를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이 정부의 정책을 압도할 수 있다.
정부의 개입은 결국 단기적인 처방이었을 뿐, 원화 가치 하락을 유발하는 구조적 원인을 해소할 근본 대책과는 거리가 멀다. '서학개미'들이 앞다투어 해외투자에 나서거나, 수출기업들이 원화 환전을 꺼리는 등 대한민국 경제를 불신하는 원인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부동산도 모자라 환율까지…금리 동결 장기화되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17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에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류영주 기자이런 상황에서 42개월째 미국보다 낮은 수준에서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한은의 추가 금리 인하 여부와 시점을 둘러싼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동안은 집값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로 금리를 연거푸 동결해왔는데, 이제는 환율과 물가까지 발목을 잡고 있다.
앞서 한은은 지난해 5월 이후 열린 네 번의 금통위 회의에서 금리를 연달아 동결했다. 부동산 시장 과열에 대한 경계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서울 아파트값 상승세는 여전한데다, 낮은 금리가 부추긴 환율 상승이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한은의 책무인 물가 관리까지 비상이 걸렸다.
한은도 위의 보고서에서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 근방에서 등락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높아진 환율, 내수 회복세 등으로 상방 압력이 예상보다 확대될 수 있"다며, 금융안정 측면에서도 "수도권 주택가격 및 가계부채 리스크 전개 상황, 환율 변동성 확대의 영향 등에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부동산과 환율, 물가가 안정을 되찾은 가운데 내년 성장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금리 인하를 단행할 수도 있다. 비록 올해에 비해 내년에는 한국 경제를 둘러싼 여건이 개선돼 성장률 전망이 높게 관측되고 있지만, 곳곳에 복병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홀로 수출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는 마당에 자칫 인공지능(AI)로 촉발된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힘을 잃으면 한국 경제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지역 건설 경기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올 하반기 간신히 내수가 회복됐지만, 원화 약세 상황에서 정부가 전국민 민생회복 소비쿠폰처럼 재정을 동원한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되풀이할 수도 없다.
다만 아무리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만약 환율이 1500원대를 오르내릴 정도로 치솟는다면 금리 인하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에게 더 위험한 맹독으로 작용할 수 있어, 한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한은도 보고서에서 "(내년) 성장세는 잠재 성장률 수준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이나 전망 경로상에 글로벌 통상환경, 반도체 경기, 내수 회복 속도 등과 관련한 상·하방 위험이 높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