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에 나서고 있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5일 의회 연설에서 "한국 관세가 미국보다 4배나 높다"고 주장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장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2012년 발효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따라 양국은 대부분 상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했으며, 지난해 기준 대미 수입품에 대한 실효 관세율은 0.79%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우리나라의 최혜국대우 실행세율(MFN applied rate)이 13.4%로 미국 3.3%의 약 4배지만, 이는 양자 협정이 없는 WTO 회원국에 적용하는 세율로서, 우리나라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적용하는 한미 FTA 협정세율과는 다른 개념이다.
미국 관세부과 소식 전하는 멕시코 신문. 연합뉴스트럼프가 뚜렷한 근거도 없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뭘까?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김태황 교수는 캐나다와 멕시코 사례에서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트럼프는 두 나라에 대해 느닷없이 25% 관세 압박을 가하면서 펜타닐 마약 미국 유입과 불법 이민자 문제를 거론했다. 관세 장벽 강화 목적에 무역수지 불균형 문제 해소가 포함되는 건 분명하지만, 마약 유입과 불법 이민 문제 해결에 무게가 더 실렸다는 분석이다.
마약 유입과 불법 이민 문제를 거론하며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건 바꿔 말하면 해당 문제 해결을 위해 신뢰성을 담보한 노력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세율을 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관세 부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게 김 교수 설명이다.
"트럼프 거듭 강조한 '조선 협력'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어"
이에 비춰보면 "한국 관세가 미국 4배"라고 주장하는 트럼프의 노림수를 짐작할 수 있다. 해당 발언을 하면서 트럼프는 "한국은 미국이 군사적으로 아주 많이 도와주는 우방인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우리나라를 향한 트럼프의 관세 압박 주목적 중 하나가 방위비 인상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 집권 1기 때도 트럼프는 우리나라에 대한 방위비 인상 압박을 한껏 고조시킨 끝에 2019년 결국 우리나라의 연간 한미 방위비 분담금 1조 원 시대를 열어젖힌 바 있다.
5일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또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백악관에 새로운 조선 담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미국 조선업에 투자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업을 원래 있어야 할 미국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라고 트럼프는 강조했다. 트럼프가 취임 전 당선인 시절부터 우리 조선업을 콕 집어 협력을 요청하면서 국내 조선업이 2기 트럼프 행정부 최대 수혜 업종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지만, 이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조선업을 원래 있어야 할 미국으로 가져와 미국 조선업을 재건하겠다는 트럼프 발언은 경쟁력 있는 외국 조선업체들의 대규모 미국 투자는 물론 우수 기술 인력 유치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태황 교수는 트럼프가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한미 조선업 협력' 핵심을 미국이 중국과 해양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한국을 활용해 미 해군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해군 군사력 강화의 골자인 군함 대량 건조는 고도의 보안과 기밀성이 요구되는 사안인 만큼 미국 현지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트럼프가 우리나라에 대한 관세 압박을 한국 조선업의 대규모 미국 투자와 고급 기술 인력 지원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는 의도하지 않게 국내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선업 기반을 약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알래스카 사업 韓 참여 기정사실화…"수천조 투자" 황당 발언
알래스카 푸르도베이의 기존 유전 시설. 연합뉴스트럼프는 또 하나의 역점 사업인 '알래스카 천연가스(LNG) 프로젝트'에 우리나라를 끌어들이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5일 연설에서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 등이 알래스카 프로젝트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날 산업통상자원부 안덕근 장관은 "알래스카 프로젝트 참여가 안보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며 긍정적 검토 입장을 밝혔는데 트럼프는 아예 우리나라가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고 코를 꿰고 나선 것이다.
알래스카 프로젝트는 미국 알래스카 남북을 가로지르는 지름 1미터, 길이 무려 1300킬로미터의 LNG 수송관과 액화 설비 등을 건설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초기 사업비만 440억 달러(64조 원)로 추산되지만, 경제성이 불투명해 세계 굴지의 에너지 기업인 엑손모빌과 브리티시페트롤륨(BP) 그리고 코노코필립스가 2016년 일찌감치 발을 뺀 사업이다. 특히 트럼프는 프로젝트 참여를 희망하는 한국과 일본 등이 각각 수조 달러(수천조 원)를 투자할 것이라는 황당한 발언을 쏟아냈다.
한미 양국은 최근 알래스카 LNG 개발과 관세 문제 등 논의를 위한 5개 분야 협의체를 구성했다. 우리나라는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검토해 알래스카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지만, 향후 양국 실무 협의 과정에서 미국 측이 관세 장벽 강화를 앞세워 우리나라에 대규모 알래스카 프로젝트 투자를 강력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