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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정책의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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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일본이 중·일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던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난데없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공표했다.

우리는 일본 식민치하의 마지막 5년 동안 극성스레 강요된 이 정책에 대해, 그저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외자(外字) 일색의 한국식 ''성(姓)''을 이자(二字)로 된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것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의 중학교 ''국사''는 "일제는 우리들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성(姓)과 명(名)으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강요했다"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처럼 한국식 성과 일본식 씨(氏) 개념을 혼동해서는 창씨개명 정책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다.

일제가 추진했던 창씨개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창성(創姓)이 아니고 창씨(創氏)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성은 종족집단을 일컫는 표시며 한국인에게 조상이나 혈통은 국가보다 강하다. 반면, 한 집안의 가장인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이에(家)'' 제도에서는 조상이나 혈통에 대한 집착이 약하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류씨(柳氏)는 본관이 서로 다른 풍산·서녕·선산·전주·진주·문화 류씨 모두를 통칭하는 종족집단의 성이지만, 일본에서는 종족집단을 아우르는 성 대신 가문 별로 다른 씨를 쓴다.

한·일 과거사에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정치인들과 우익 논객들은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 정책이 조선인에게 일본식 씨와 명을 주어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없이 대우하기 위해서였다고 실언하며, 거기에 강제는 없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20%를 예상했던 총독부의 계산과 달리 6개월 동안 80%를 달성한 높은 창씨는 온갖 종류의 압력과 회유를 총동원한 끝에 이루어졌으며, 창씨를 반대하는 언동은 보안법으로 처벌됐다.

또한 창씨 강요의 반대편에서, 일본인과 구별이 되는 창씨를 지도함으로써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동화와 차별화를 동시에 진행했다는 사실은 특기해 두어야 한다.

미즈노 나오키의 ''창씨개명''(산처럼, 2008)에 따르면 창씨가 ''법적 강제''였던 반면 개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무방한 ''임의 사항''이었다. 실제로 개명은 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일제가 조상중심주의의 조선 성씨를 없애고 일본식 이에의 칭호인 씨 제도를 이식하려고 했던 이유는, "천황을 종가(宗家)로 하여 그 아래 신민인 각 가(家)가 분가(分家)로서 존재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일본의 국가·사회체제와 달리, 조선 사회에 강고한 종족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천황의 이름에 의한 식민지지배체제를 불안정하게 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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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일제는 조선 전통의 조상중심주의가 "각 가정이 천황과 직접 결부"되는 일본식 통치체제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고, 성씨를 해체함으로써 조선식 가족제도를 일본식 가족제도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0년부터 창씨에 돌입한 까닭은, 조선인을 병사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천황에 대한 일사불란한 충성심을 이끌어낼 새로운 사회 구조가 필요해서였다.

소설가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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