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원이나 되는 자신의 전 재산을 오로지 조선 왕가의 이건(移建)에 쏟아부은 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집은 고종황제의 영손(令孫)으로 조선조 역대 왕의 종묘제례를 관장했던 황족 이 근(李芹)의 고택이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의 기숙사 건립을 위해 헐릴 위기에 처했던 이 왕가는 3대째 한의학을 연구하고 있는 남권희(51) 씨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오늘 노컷피플의 주인공은 전통 한옥호텔인 '조선왕가'의 남권희 이사장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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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8월 15일. 성균관대학교 '새천년 홀'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둔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1번지에서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전통 한옥의 해체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은 벌써 두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은 특히 대들보를 해체하는 날이었는데, 오후 2시쯤 붉은 비단보자기에 싸인 상량문이 대들보에서 금과 은, 동과 같은 보물과 함께 발견됐다.
상량문은 주인이 집을 지을 때 사고가 없고 다 짓고 나서도 부귀공명을 누리게 해달라 축원 등을 담은 글이다.
"상량문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됐죠. 이 집의 주인은 고종황제의 영손인 이 근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요. 왕족의 집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겁니다. 집의 이름은 미나리처럼 혼탁한 물속에서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자라는 기상을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은 '염근당(念芹堂)'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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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사들인 한옥이 조선왕가일 줄이야···" 조선왕가 염근당은 1800년대에 창건되고 1935년에 99칸으로 중수된 황실가의 전통 한옥이었다.
창건 당시 상량문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무정(茂亭) 정만조 선생이 짓고 당대의 명필 농천(農泉) 이병희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 상량문의 마지막 문장은 또 한 번 남 이사장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상량문의 마지막 문장이 '일화석필사신부분택영존(一化石必使愼守芬澤永存)'이에요. 뜻을 풀면, '꽃 한 송이 돌 하나라도 반드시 신중하게 지키시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은택이 영원히 보존되게 하여 주소서'라는 뜻이죠.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정말 이 집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 같은 것을 갖게 됐죠. 문화재로 지정해도 모자랄 조선 왕가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죠."
사실 이 집을 판 성균관대학교도, 그리고 이 집을 사들인 남 이사장도 이 고택이 조선왕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남 이사장은 3대째 한의학을 연구하는 집안의 장손으로서 유달리 한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또 글을 쓰는 부인 김미향(44) 씨도 늘 한옥에서 살고 싶어 했다.
이런 이유로 염근당은 당시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남 이사장의 눈에 우연히 띄었고 결국 인연을 맺게 됐다.
남 이사장이 이 고택을 산 배경에는 이 부지에 성균관 대학교가 기숙사를 짓기로 해 곧 이 집이 헐릴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처럼 조선왕가가 한동안 역사 속에 묻혔던 것은 일제 식민지배의 영향이 컸다. 남 이사장이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이 집은 1910년까지만 해도 국가 소유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그 소유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만다. 해방 이후에는 잠시 극동그룹 김용산 회장의 사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염근당 후원에 있는 자은정(紫恩亭)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 해체된 자재만 25톤 트럭 '300대'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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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해체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2008년 12월 7일까지 3개월이나 더 이어졌다.
해체와 복원작업은 무형문화재 도편수(都片手) 최명렬 선생이 직접 지휘했다.
특히 그는 대들보와 서까래, 기둥, 주춧돌, 기단석에 번호를 일일이 기록해 원형의 모습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다. 해체된 자재만 25톤 트럭으로 300대 분량이나 나왔다.
염근당과 자은정이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420-1번지이다. 뒤에는 자은산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수백만 평의 연천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진 곳이다.
연천평야 너머에는 한탄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어서 예로부터 만석꾼의 저택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뒷산에서는 뻐꾸기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반딧불이도 있고요. 드넓게 펼쳐진 논에는 우렁이와 미꾸라지가 많아 백로들도 많이 모여듭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거리지만, 조선왕가의 터로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 남 이사장은 이곳에 조선왕가를 복원하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우리의 황실가의 전통 한옥을 되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일본식 문과 창, 다다미를 모두 제거한 것이다. 이건공사는 2009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다.
최명렬 선생의 진두지휘 아래 조선왕가 염근당과 사반정, 효경문, 전각문, 자은정이 하나씩 지어지면서 왕가의 웅장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기와공사는 무형문화재 와공(瓦工) 이도경 선생이 직접 감수했다.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 목재는 그 당시 춘향목으로, 기와와 주춧돌, 기단석, 토방돌까지도 그 당시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리고 왕가의 벽체와 바닥은 천연 황토를 사용했다.
"황실가의 건축양식은 대들보와 기둥으로 사용한 목재에서 잘 나타납니다. 양반가나 사찰에서 쓰던 곡재(曲財)가 아니라 모두 반듯한 직재(直材)입니다. 대들보는 경북 봉화에서 가져온 600년 이상 된 금강송으로 썼고요, 기둥으로 사용한 목재도 300년 이상 된 것입니다. 당시 수레로 한양까지 이 수많은 목재를 날랐다는 것은 공권력이 동원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국가사업이었다는 것이죠. 기단도 화강암 장대석으로 3단으로 쌓았습니다. 이 역시 당시 황실이 아니면 아무나 쌓을 수 없었습니다. 또 복과 다산을 뜻하는 박쥐 문양의 막새도 오직 왕가에서만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영혼의 쉼터'가 될 수 있는 '한옥호텔'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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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권희 이사장이 이처럼 고종황제의 영손인 이 근의 고택을 서울 명륜동에서 이곳 연천으로 올기는 데에는 무려 100억 원이 들었다.
고택 구입비와 이건비만 약 70억 원. 그리고 소나무와 돌을 사들여 조경하는 데에도 30억 원이 들어갔다. 거의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셈이다.
그는 이 공사를 하면서 인생관과 가치관도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한약재 사업이 날로 번창해 그동안 그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누리고만 살아왔다.
하지만, 이 조선왕가와 인연을 맺으면서 우리 한옥에 담긴 선조의 지혜와 멋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으로 나아가는데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남 이사장은 지난달 인천에서 열린 세계한인언론인대회에 참가해 '조선왕가'의 이건공사에 대해 설명해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실제로 참가자들로부터 '호주와 미국, 중국, 베트남, 터키, 태국 등에도 조선왕가를 복원해 지을 수 없느냐?'라는 문의와 요청이 쇄도했다.
남 이사장은 조선왕가 이건공사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앞으로 조선왕가 건립사업을 외국에서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그는 또 이달부터 이 조선왕가(www.royalresidence.kr)를 '한옥 호텔'로 개방해 누구나 와서 옛 건축물에 대한 멋과 풍류를 느끼며 충분히 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미술관을 운영하고 주말에는 작은 음악회와 마당놀이도 열어 이 조선왕가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올 여름방학에는 해외동포 자녀가 함께 참여하는 '2011 청소년 전통문화 국제캠프'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동안 황족이나 정·재계의 최고위 인사들만 머물 수 있었던 왕손의 집을 온 국민에게 개방해 직접 묵을 수 있도록 한 곳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우리 전통 한옥뿐 아니라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와 비가 올 때의 낙수 소리, 연천평야의 아침 안개, 그리고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달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번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남 이사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조선왕가'와 맞바꿨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