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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누구인가 …''샐러리맨''에서 ''대통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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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정당)

    이명박은 누구인가 …''샐러리맨''에서 ''대통령''까지

    • 2007-12-19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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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당선자는 평범한 셀러리맨에서 대기업 CEO를 거쳐 서울시장,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굴곡과 성취를 거듭하면서 드라마틱한 인생행로를 걸어왔다.

    70~80년대 현대건설 CEO로서 산업화에 중심에 서 있다가 정주영 회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현대를 떠났던 이명박 후보는 정치로 인생의 행로를 바꾼 지 16년만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정치 1번지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또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정치적 외형을 확대해 가면서 대통령의 꿈을 구체화시켜 나간다.

    시장 재직 시절 엄청난 반대를 뚫고 청계천을 복원하고 역대 어느 시장도 성사시키지 못했던 대중교통의 혁명을 이뤄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주목받기 시작했고 당시의 업적은 대권가도에서 탄탄한 자산이 됐다.

    <출생과 유년시절>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가난한 목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의창면 덕성동 537번지 이지만 부친이 일제 강점기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이 당선자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목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기반을 잡았지만, 귀국길에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린시절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속에서 성장한다. 이 전 시장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통해 가난했던 당시의 처지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옆 집에 거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비록 거지지만 아침 저녁으로 동냥을 해서 배불리 먹고 살았지만 자신은 끼니조차 제대로 떼우지 못해 부족한 식량을 술도가의 술 찌게미로 채우다 보니 술에 취해 얼굴이 늘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포항 영흥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를 거쳐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하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거듭된 권고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지상고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이 당선자는 수레를 끌고 다니며 김밥과 풀빵, 뻥튀기, 과일 행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보태는 어려운 처지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굴껍데기 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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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경과 대학시절>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이명박은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1959년 12월 동생과 함께 진학이나 생활에 대한 대책없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당시 이 당선자의 어머니는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놓고 이태원시장에서 노점으로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학진학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그는 재수를 하던 한 학생을 만나면서 자신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청계천 헌 책방에서 책을 구해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낮에는 날품팔이 밤에는 입시준비 주경야독으로 19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하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학비 때문에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이 당선자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의 대학합격을 축하하기는 커녕 "니가 어쩌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책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태원시장 상인들이 시장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 줘 이른 새벽 시장으로 나가 수레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 한강변까지 내다 버리는 고학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이 당선자는 "자신의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어려운 성장과정으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도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려는 노력으로 지금은 성격까지도 바뀌었다"는 말을 종종 한다.

    친구도 돈도 없던 대학 재학 시절 단과대학 학생회장에 혈혈단신으로 출마한 것도 이런 그의 생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선거에서 학생회장에 당선돼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하다6개월의 옥고도 치렀다.

    <현대건설 입사에서 CEO까지>

    대학을 졸업한 이명박은 한 동안 취직이 안돼 고생했다. 6.3사태 때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전력이 꼬리표로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원서를 내는 곳마다 신원조회 과정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내는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당시 조그만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현대건설에서 그의 성장과 성취는 실로 놀랍다. 입사 5년만에 이사로 승진하고 12년만인 1977년 만 35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 오르고 이후 인천제철과 현대산업개발, 대한알미늄, 현대엔지니어링, 한라건설 사장을 거쳤고 1988년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한무백화점 등 5개 현대계열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세간에서는 이 당선자의 초고속 승진과 오너에 버금가는 사내 영향력 등을 들어 ''셀러리맨 성공신화''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현대 재직 중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건설을 지휘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고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당시에는 건설현장에 몰려든 폭도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도 금고를 부여잡고 끝내 내주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주영 전 현대회장이 대선출마를 결행할 때 지원요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 발단이 돼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현대를 떠나 52세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정치입문 이후>

    이명박 전 시장은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4년 뒤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4선의 관록을 자랑하는 이종찬 의원과 노무현 후보 등 쟁쟁한 후보들과 격돌해 국회의원 재선을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정치인생에도 굴곡이 있었다. 95년 전면적인 지방자치 선거에서 여권 핵심부의 서울시장 경선반대로 서울시장에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됐고 종로선거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될 처지에 놓이자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2번째 서울시장선거에 도전했을 때는 당내경선에서 정원식 전 총리에게 패배했고 99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의 객원연구원으로 정치적 낭인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서울시장선거에서 민주당 김민석 의원과 맞붙어 민선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재기생했고 이후 4년의 시장 임기는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는 시기였다.

    시장 재임 중 수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청계천 복원사업을 강행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고 지하철과 버스 환승체계 수립, 중앙차로제 도입 등으로 요약되는 서울 대중교통개혁을 밀어부쳐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밖에도, 뚝섬 서울숲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성공적으로 조성하고 서울 지하철 부채를 크게 줄이는 등 행정에 경영마인드를 도입해 시정을 개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명박 후보는 이같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라이벌인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대권에 도전했고 BBK주가조작사건과 위장전입 등 위기 속에서도 경제에 대한 기대심리를 바탕으로 대세론을 지켜내며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경북 영일군 출생(66세) ▲ 포항 동지상고, 고려대 상대 ▲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 14대, 15대 국회의원 ▲ 32대 서울시장 ▲대통령 당선 ▲ 부인 김윤옥씨(60)와 1남 3녀



    [이명박 당선자 대국민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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