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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6.10 항쟁 시위 현장을 시위 현장을 뜨겁게 달궜던 그때 그 노래들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학생들과 넥타이부대, 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87년 6월의 노래가 귓가를 다시 울린다.
지난 87년 6월 9일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흔들리지 않게 서로 단결해 하나 같이 시위 현장으로 쏟아져 나올 때면 어김없이 ''흔들리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며 불렀던 노래 ''흔들리지 않게''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맞선 항쟁에서 그 어떤 정치구호보다도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했고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떨쳐버리게 했다.
[BestNocut_L]''우리의 소원은 통일'' ''애국가''를 비롯해 ''나의 살던 고향'' 등 그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던 노래들은각 계 각 층의 시위대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87년 6월 10일, 서울 곳곳에서 몰려온 40만 명의 시민들이 청계천 고가 밑을 지날 때면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들은 큰 울림이 되어 종로일대까지 퍼졌다.
시청 앞에서 을지로로, 다시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간 시위대가 성당을 둘러싼 경찰병력에 맞서 ''해방 되는 희망찬 내일''을 외칠 때도 동지들의 노래는 이어졌다.
''휘몰아 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동지가다. 이때 ''동지가''는 그 가사처럼 함께 했던 명동성당의 농성대가 가장 즐겨 불렀다는 노래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는 시위현장에서 숨고 또 쫓기다 보면 시위대가 진압 위치를 잘못 잡은 전경들을 포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위대는 ''민주경찰 투항하라 훌라훌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이른바 ''훌라 송''을 부르며 잠시 잠깐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에 끌려갔던 그때, 술집에 자리한 동지들은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생각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기도 했다.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떨리는 노여움이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감회가 새롭다.
고려대 국어교육과 85학번 손병구씨(고대 민중가요 모임 노래얼)는 "삶이 좋고 기쁠 때는 그때의 좋았던 기억이 어우러지는 듯 하고 우울할 때는 용감했던 내 삶에 지금의 부끄러운 삶에 대비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며 "그런 노래들을 기억하고 알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 활동했던 이준영씨(고려대 사회학과 84학번)는 "만 20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답답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10년, 15년 전에 비해 더 생각이 나고 가끔 부르는데 20대 대학시절 생각이 난다"며 "노래를 들을 때 열심히 산 20대인만큼 더 뜨겁고 헌신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87년 6월의 산하에 울려 퍼졌던 노래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민주항쟁 속의 스며든 민중가요, 그때 무엇이 있었나 |
지난 1987년 6월 불러진 민중가요는 크게 독립군가와 민요 등 옛 곡을 계승한 가요, 김민기 김영동 류의 창작곡, 학생운동권에서 만든 노동현장곡, 개사곡 등 4줄기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시위 현장에서 불린 노래는 민중가요라는 개념보다는 운동가요라는 개념이 더 가깝다. 노래가 많지 않다보니 저항의 개념을 계승해서 나온 독립군가와 민요가 각각 축을 이뤘다. 많이 불린 독립군가로는 ''해방가'' ''신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이, 민요로는 ''석탄가'' ''타박내야'' ''진주난봉가'' 등이 있다.
김영동이 만든 ''한''을 주제로 한 ''한네의 이별''과 같은 현대화되고 서정적인 국악창작곡도 주류를 이뤘다. 문학에서 김지하의 ''오적''이 있었다면 음악에서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있다고 할 정도로 ''공장의 불빛'' 앨범의 삽입곡들도 87년 6월의 음악으로 단연 꼽힌다.
급격한 산업현장의 왜곡 과정 보여주는 노동현장에서 만들어진 곡들로 ''야근'' ''공장의 불빛'' 들은 처연한 노동현실을 드러내 주었다. 김민기가 양희은을 통해 부르게 한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대중적으로 불렸다.
80년 광주항쟁이 화두로 대두되면서 나온 ''5월가''와 ''5월의 노래'' ''새'' ''새2''와 같은 아주 서정적이고 슬픈 노래들도 87년 6월을 함께 한 대표적 창작곡들이다.
학생들이 주도한 본격적인 행진곡 풍의 선동성이 큰 운동가요는 70년대말과 80년대 초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기본적으로 ''농민가'' ''새농민가'' ''동학농민가''가 있다. ''동지가''와 ''선동에 서서'' ''어머니의 노래'' 등도 대표적이다. 서정성이 풍부한 ''녹두꽃''과 같은 학생곡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폭이 좁았기 때문에 개사곡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또한 많이 불렸다.
대표적으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많이 개사해 불렀는데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XX...'' 같은 식이었다. 또, 당시 시대적으로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수 정수라가 불러 논란을 부러 일으켰던 ''아! 대한민국''은 ''하늘엔 최루탄이 떠있고...''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80년대 초에 나온 노래는 학습효과를 노린 현실분석 가요들이 주를 이뤘다. 집회를 할 때도 언제 잡혀 갈 지 모르는 현실을 극복하고 연대감을 강화하는 ''흔들리지 않게''가 주로 불렸는데 학생들이 학내에서 집회를 하거나 거리로 진출할 때 돌파를 시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힘을 주었다.
가두시위 때도 모여 있다가 찻길로 뛰어들 때면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곧바로 최루탄이 날라오는 현실 앞에 ''짧지만 강한 감흥을 주는'' 이 노래밖에 부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흔들리지 않게(가사 전문/듣기)
{AOD:1}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 /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 /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해방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 해방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통일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 통일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6.10 항쟁 당시 몰려온 넥타이 부대와 시민들을 단합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아침이슬'' ''애국가'' ''상록수''와 같은 대중적인 노래들이 많이 불렸다,
가두 집회에 다녀온 학생들이 막걸리 집에 집결할때면 전경에 잡혀간 친구들이 있기 일쑤였다. 이들은 ''타는 목마름으로''를 한없이 부르며 슬픔을 달랬다.
87년 6.10 항쟁이 끝나고 이어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며 노동가요가 쏟아져 나온 뒤 88년 전대협이 통일운동을 기치로 내걸면서 통일가요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CBS사회부 강인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