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태권V = 마징가Z?…김청기 감독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

    태권V = 마징가Z?…김청기 감독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김청기

     

    김청기 감독은 로보트 태권브이가 마징가 제트를 표절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분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시절 우리 만화의 수준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로보트 태권브이에 얽힌 김청기 감독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김청기 감독


    - 로보트 태권브이가 언제 만들어졌죠?

    1976년이니까 올해로 30년 됐네요.

    - 로보트 태권브이 개봉일에 어디 계셨나요?

    대한극장의 관객들 틈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었고, 일주일 동안은 극장에서 관객들과 같이 지냈죠.

    - 그렇게 흥행할 거라고 예측을 하셨나요?

    어느 정도 예측은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잘 되니까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정말 지구가 주먹만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이럴 때일수록 나를 되돌아보고 겸손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죠. 사실 기대 이상 흥행하니까 실감이 안 나더라고요. 어쨌든 끝나고 나니까 김청기라는 이름이 각인됐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어깨가 무거워졌고, 또 희망도 커졌어요.

    - 로보트 태권브이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한국의 디즈니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애니메이션을 하기 전에 만화작가로 6년 동안 일하다가 대한극장에서 백설공주와 피터팬을 봤는데 입체적이고, 음향이 들어가고, 표현이 무궁무진하고, 경이로웠어요. 그동안 해왔던 인쇄만화가 답답해지면서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 홍길동이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한 뒤로 보물섬, 손오공 등이 만들어졌는데, 70년대 초엔 우리의 기술이나 티비의 보급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로 조건이 안 좋았어요. 그리고 제작비에 비례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게 돼 있는데, 흥행이 안 되니까 악순환이 더 커졌어요. 그래서 70년대 초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전무하는 암흑기가 왔었죠.그러다가 마징가Z가 흥행하는 걸 보면서 만화영화 하는 사람들은 괴로웠어요. 당시만 해도 일본문화를 터부시했고, 또 우리 아이들이 컸을 때 마징가Z가 일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이 그려지더라고요. 우리 것인양 이름도 다 바꾸고, 자칫하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속임수를 쓴 것처럼 될 수 있다는 것들이 부담으로 왔어요. 그리고 인기가 있는 만큼 너무 폭력적인 등 부작용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애니메이터들과 함께 했던 거에요.

    - 1976년에 미국에 판권을 파셨다고요?

    원판에서 복사용 원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당시에 필름이 영화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났어요. 그런 비용 부담 때문에 필름값을 아끼려고 원판 1,2,3판을 미국으로 수출해버린 거에요. 원판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가정에서 줘버린 거죠. 하지만 원판을 들여온다는 건 외화 한 편을 수입하는 것과 같았어요. 당시 쿼터 한 편당 5000만원이었기 때문에 총 1억 5000만원이 들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죠. 결국 원판 1,2,3편이 미국으로 수출된 이후로 찾을 길이 없었어요.

    - 그 필름을 2003년에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다시 찾았다고요?

    극장에서 돌아갔던 필름 중 깨끗한 필름이 발견된 거에요. 필름이 창고에서 돌아다니다보니 훼손된 부분이 많았는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복원했죠. 올해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상영될 거에요.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복원판이 상영됐었죠?

    네. 그때 부산에 가서 무대인사도 하고 반응도 봤어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관객들이 이젠 부모가 돼서 아이들과 함께 와서 보는데,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리고 너무 감격스럽다고 하더라고요.

    - 태권브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셨다고요?

    지금 같으면 지방 흥행사들한테 판권료를 받아서 제작비에 썼을 텐데, 당시만 하더라도 만화영화가 흥행이 된다는 공식이 없었어요. 각 지방의 판권업자에게 판권을 미리 팔아서 제작비로 쓰는 건데, 당시엔 판권을 초기에 미리 팔아버렸기 때문에 판권료가 진행비 정도밖에 안됐죠. 그래서 1800만원 짜리 우리집이 송두리째 없어지기도 하고... 그거 갚는 데 3년 정도 걸렸어요. 똘이장군이 흥행해서 갚아줬죠. 하지만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었어요. 아내도 "당신, 그래도 이름 석자는 났잖아"라고 위로해줬어요.

    - 태권브이의 캐릭터 사업으로도 돈을 못 버셨나요?

    당시엔 저작권이나 캐릭터 사업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때라서 해먹고 도망가면 그만이었어요. 완구로 돈을 번 사람들은 많았지만 저작권료는 전혀 받지 못했어요. 법적으로 우리가 사람을 보내면 이미 도망가고 없는 거에요. 펀치볼로 약 300만원 정도의 판권료를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 일본만화의 영향은 어느 정도 받은 건가요?

    당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초기였고, TBC에서 일본OEM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 로보트 태권브이에 많이 참여했었기 때문에 터치라든가 모습에서 일본적인 모습이 나긴 해요. 히지만 그땐 로보트 태권브이를 어떻게 하면 일본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느냐가 숙제였어요. 결국 실력이 그것밖에 안됐다고 자탄하는 수 밖에 없어요. 마징가를 닮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피해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근데 당시 기계로봇이 전무했었고 그런 상식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일본 마징가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죠. 문화란 건 위에서 밑으로 흐르게 돼 있잖아요. 태권브이가 아니라 마징가라는 제목으로 나갔다면 더 히트할 수 있었을 거에요. 그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거든요. 일본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가 제목까지도 그대로 쓴 작품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양심을 팔면서 작품을 할 수 없다는 신조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면서 제 캐릭터도 이순신 장군 이미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꽤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태권브이가 이순신 장군 동상 투구 모양을 많이 닮았다는 얘기도 많이 듣죠.

    - 그동안 표절 이야기가 많이 나왔죠?

    의도적으로 표절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피해갈 수 있는가가 숙제였죠. 그만큼 마징가가 강했던 건 틀림없어요. 두 발의 인간형 로봇을 그리려니까 자꾸 그런 형태가 나오는 거에요. 그걸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태권브이의 적군이 붉은왕국이었던 건 일부러 설정하신 건가요, 아니면 정치적 압력이 있었나요?

    압력보다는 저희 아버지가 6.25 때 납치당하신 비극도 있었고, 제가 어렸을 땐 북한이 제1의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죠.

    -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태권브이가 끝나고 똘이장군 시리즈로 돈도 많이 벌었고, 황금날개와 삼국지, 그리고 우뢰매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극장 흥행이 잘 안됐어요. 비디오나 일본 만화영화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왔고, 컬러티비가 보급되면서 어린이물이 극장에서 흥행이 안됐어요. 또 출판이나 극장업 등 다른 사업을 하다가 손해도 많이 봤고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제가 딴짓 하다가 손해를 많이 봐서 한 10년 동안 작품도 많이 보고 아이디어 구상을 했죠.

    - 어렸을 때 가장 처음 접한 만화 속 주인공은?

    6.25 전에 최상권 씨가 거대 로봇 만화를 그리셨어요. 두 발로 걸어가는 로봇인데, 그 모습이 빨간 우체통하고 비슷해요. 그 로봇이 끊어진 한강 다리에 몸을 눕혀서 길을 건너게 했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만화세계에 연재됐던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아있고요.

    -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역시 태권브이를 만들 때죠. 아무래도 첫 작품에 대한 희망도 있었고, 의욕도 있었어요. 60여 명의 팀원들이 3개월 동안 집에도 못 가고 사무실에서 숙식하면서 고생해서 만들었어요. 그때 함께 일했던 한 친구는 태권브이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빠졌다고 원망하기도 해요. 그만큼 혼혈을 다해서 노력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어요. 그게 또 한국 만화영화의 중흥을 맞게 해준 계기가 됐고, 그래서 계속 김청기라는 사람이 만화영화를 계속 할 수 있었죠.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죠.

    -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태권브이가 크게 히트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결산해보니 1800만원 이상 빚이 남은 거에요. 지금은 투자자가 있지만 그때는 전부 개인돈을 빌려서 투자를 했는데 결국 갚지 못하는 상황이 온 거죠. 집사람이 친구들이나 친정에서 돈을 빌려오기도 했는데, 계속 약속이 무산되니까 나중엔 집사람 입이 다 돌아가더라고요. 그 사람이 저승길을 몇번 왔다갔다 했죠. 그때 고통이 가장 컸어요. 빚쟁이가 집에 오면 해결할 길이 없었어요. 당시 우리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작은 아이가 5살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는 자기 저금통을 엄마한테 갖다 주면서 빚 갚으라고 하더래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가슴 아파요.

    - 로보트 태권브이가 성공한 후로 다른 유혹은 없었나요?

    실사영화 쪽에서 같이 기획해서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도 있었어요. CF 쪽에서도 일이 많이 들어왔고요. 하지만 초지일관 한국의 월드 디즈니가 되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애니메이션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년에 두 작품 이상은 했어요.

    - 친한 만화가나 애니메이터는?

    선우 엔터테인먼트의 초기 회장이었던 강한영씨나 태권브이 할 때 같이 고생했던 임정기 씨와 친해요. 임정기 씨는 나중에 마루치아라치나 별나라삼총사의 감독을 했어요.

    - 가장 고마운 사람은?

    아내 빼고는 주위 친구들이죠.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를 아껴주고, 길을 만들어주는 친구들이 몇몇 있어요. 강한영 씨도 그렇고, 저에게 애니메이션의 길을 열어준 윤충국 씨 등.

    - 우뢰매를 만들게 된 계기는?

    디즈니의 메리포핀스라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세계도 있구나 싶었어요. 당시엔 애니메이션도 흥행이 안됐던 때라 돌파구로 우뢰매를 기획했어요. 그런데 우뢰매는 실사 한 편을 다 찍고 거기다 애니메이션을 합성했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었어요. 당시 애니메이션 한편 제작비가 1억 2000만원 정도였는데 우뢰매는 2억 5000만원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제작비 아끼려고 그림매수를 줄이기 위해 실사를 합성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사 합성하는 촬영값이 더 들었죠.

    - 심형래 씨를 캐스팅한 이유는?

    우뢰매 전에 황금날개라는 작품의 주인공이 착하고 바보스러운 캐릭터였어요. 그런 주인공이 위기에 덤블링을 하면 초능력자가 되는 걸로 재미를 봤었기 때문에 그걸 우뢰매가 다시 리바이벌한 거죠. 심형래가 갖는 바보스러움. 그런 캐릭터가 덤블링을 하면 초능력자가 되는 거죠.

    - 앞으로 광개토대왕을 제작하신다고요?

    제가 참여하면서 스토리보드도 만들어주고 있어요. 대작이고, 안해봤던 영역이라 해보고 싶어요.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