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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아들을 살해한 비극의 현장- 창경궁 문정전



공연/전시

    아비가 아들을 살해한 비극의 현장- 창경궁 문정전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⑰

    가을빛이 완연한 창경궁 전경. 일제에 의해 놀이공원으로 전락했다, 80여년만에 궁궐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진=문영기 기자)

     

    ▲유원지로 전락한 궁궐 -창경궁

    서울의 지명 가운데 원남동과 원서동이 있다. 원남동은 ‘원(苑)’의 남쪽 동네, 원서동은 당연히 ‘원’의 서쪽 동네를 칭한다.

    여기서 ‘원’은 창경원을 의미한다. 4백여년을 이어온 궁궐이 일제에 의해 한낱 유원지로 전락하고, 거기서 유래한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일제의 잔재는 정말 뿌리 깊고 질기다.

    창경궁은 대비, 즉 어머니를 셋이나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이 편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수강궁을 확장해 만든 궁궐이다.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주거공간으로 창덕궁의 보조 궁궐 역할을 했다. 지금도 창덕궁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창경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그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광해군이 다시 중건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놀이 공간으로 전락했다.

    궐내각사들이 철거된 자리에는 동물들을 가두고 전시할 철망우리가 들어섰고, 임금이 직접 논농사를 지으며 백성의 고단함을 살폈던 내농포에는 일본식 연못이 만들어졌다.

    70대 창경원의 모습. 봄을 맞아 꽃놀이를 즐기려는 인파로 창경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은 일제는 궁궐을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인들에게 놀이공간으로 개방했다.

    그렇게 변모한 창경원에서는 80년대초까지 봄이면 이른바 ‘야사쿠라’, ‘밤 벚꽃놀이’가 흥청망청 벌어지기도 했고, 내농포가 있던 연못에서는 젊은이들이 보트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창경원’ 구경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됐던 시절도 있었다. 주말이면 창경원을 들어가기 위한 암표가 극성을 부리는가 하면, 담을 넘어 들어가는 극성 시민들도 있었다.

    1983년 서울대공원이 개장하면서, 동물원 시설은 모두 그리로 옮겨갔고, 80여년만에 ‘창경궁’으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지만, 일제가 훼손한 흔적은 아직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창경궁 문정전. 이 앞마당에서 당파싸움에 희생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사진=문영기 기자)

     

    ▲아비가 아들을 살해한 비극의 현장 - 문정전(文政殿)

    엎드려 이마를 조아리고 있는 세자의 앞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 한 자루가 던져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결을 명했다. 어린 세손까지 달려와 아비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지만, 환관들에게 끌려 나갔다.

    창경궁 문정전 앞 뜰에서는 임금인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꾸짖으며 자결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끝내 자결을 거부했다.

    화가 치민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라 명했다. 눈치를 살피며 아무도 나서지 않자, 영의정 홍봉한이 나서 뒤주를 가져왔다. 홍봉한은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다. 바로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아버지와 장인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세자는 염천의 여름날, 무려 8일을 물 한모금 못마시고 뒤주 속에 갇혀 있다 무참히 숨을 거뒀다.

    ▲당쟁(黨爭)의 희생물이 된 세자

    사도(思悼)세자는 나중에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면서, 죽은 세자를 애도한다는 뜻으로 나중에 붙인 이름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쟁이 빚어낸 비극적인 결과물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아버지로 등장한 사도세자의 모습. 무예를 좋아해서인지, 활을 쏘는 복장을 입고 있다. (홈페이지 캡쳐)

     

    당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영조는 노론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쟁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깨달은 영조는 각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강하게 시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권력은 노론의 손에 있었고,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소론정책을 지지하자, 노론세력은 그를 제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영조는 첫쩨 부인 정서왕후를 먼저 보낸 뒤, 66살의 나이에 무려 쉰살도 더 차이나는, 15살의 정순왕후 김씨를 두 번째 중전으로 맞이했다. 영조의 총애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노론세력은 정순왕후를 동원해 사도세자가 궁녀를 함부로 죽이고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며, 왕과 세조사이를 이간질했고 사도세자는 점차 영조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성격 급한 영조의 꾸지람이 잦아지면서, 세자는 급기야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결국 뒤주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드라마에 등장한 인종의 모습. 세자 시절 문정왕후로부터 여러차례 목숨을 위협받는등 고초를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불과 몇개월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홈페이지 캡쳐)

     

    ▲목숨을 내건 외로운 줄타기-조선에서 세자로 산다는 것

    조선시대에 다음 왕권을 이어받을 세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왕권과 사대부권력의 대립으로 점철돼온 조선의 역사에서 세자는 늘 목숨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자리였고, 권력자의 눈치를 봐야하는 불행한 자리였다.

    27명의 조선의 왕 가운데, 나라를 세운 태조를 제외하고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왕위를 물려받은 인물은 겨우 7명에 불과하다. 문종과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그들이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거나 세자에서 쫒겨 난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셈이다. 그만큼 사대부와 외척의 권력이 막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조선의 왕권이 불안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인 왕과 세자가 정적(政敵)이 되기도 한다.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를 비롯해,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인조와 소현세자가 그랬다.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선조의 미움을 받았던 광해군 역시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왕위를 물려받은 7명 역시 제대로 왕 노릇을 하지 못했다. 병약했던 문종은 어린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금방 세상을 떠났고, 왕위를 물려받은 단종은 삼촌인 세조에게 쫒겨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조선 최악의 여인, 문정왕후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았던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몇 개월만에 병사했고, 현종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제대로 왕 노릇조차 하지 못했다.

    폭군 연산과 국권을 빼앗기고 일제에 의해 사실상 감금된 채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권력의 속성은 독점과 배제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 비정한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의 2인자는 그래서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권력자 역시 불행하다.

    영욕의 세월이 스쳐간 창경궁에 가을이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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