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회 정신, 부조리와 싸운 젊은 용기"
▶ 글 싣는 순서 ①학생 항일운동 '춘천 상록회'를 아시나요?
②'광주 1929, 춘천 1938' 학생운동 '민족차별 저항'
③학생항일운동 '구호 넘어 독서회와 계몽'으로
④"상록회 정신, 부조리와 싸운 젊은 용기"
⑤광복 80년, 다시 돌아온 상록회
정용경 연구관 "상록회, 민족 위기 자각과 결속으로 대응한 운동체"Q : 상록회의 역사적·사회적 의미는?
A : 이 단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태다. 1995년과 2023년 대학에서 각각 논문이 나온 적은 있으나 주로 기존 자료를 정리한 수준에 그쳤고, 지역적 맥락이나 중앙의 상황과 연계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는 기존 논문들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들을 참고해 상록회를 재구성해 보았고 이 해석은 하나의 제안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다.
상록회는 남궁태, 이찬우, 백흥기, 문세현, 용왕각, 조규석 등 여러 인물이 만든 비밀 결사체다.
'비밀 결사'라고 하는 이유는 이 단체가 대중적인 운동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상록회의 강령을 보면 첫째, 조선 민족을 자기 민족으로 자각하고 자기 완성을 추구한다. 둘째,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며 셋째로는 조선인으로서 단결력을 배양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강령을 바탕으로 상록회는 스스로를 조선 민족적 지도자로 자각하는 비밀스러운 결사체였고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후배들로 구성된 독서부를 뒀다.
하지만 독서부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상록회는 농촌 계몽운동이나 민족 문화를 전파하는 대중운동 단체가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한글 보급이나 조선 문화 전파를 위한 운동들이 있었지만 상록회는 그런 대중적인 문화 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당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소규모 비밀 결사 형태로 민족 운동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방식이었는데 상록회가 바로 그런 10명 내외의 비밀 단체였다. 일부 논문에서는 100명 이상이 포함된 운동 단체로 과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남궁태가 조직한 모곡소년단 등 다른 단체까지 혼동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상록회는 1930년대 후반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조직한 전형적인 민족주의 운동 단체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문화를 전파하는 차원이 아니라, 중일전쟁이라는 외부 전쟁 상황에서 조선 민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자각과 대응이 가장 큰 동력이었다. 즉 민족 위기감에 대응하기 위한 내적인 결속과 자각에 중심을 둔 운동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Q : 상록회 학생들의 계급적 배경과 그들이 속한 지역적 연고성은 어떠한 특징과 의미를 갖고 있나?
A : 백흥기는 횡성 출신이고 남궁태는 홍천 모곡 출신이며, 이찬우는 춘천 우두동(강북 지역) 출신, 조규석은 여주 출신, 용환각도 홍천 출신으로 나타난다. 즉 이들은 춘천 지역 내부와는 크게 연관되지 않은 다양한 지역 출신이다. 경성지방법원 문서에 따르면 이들의 생활 수준은 대체로 중류 계급에 속하는데, 그렇다고 계급적 문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년 후배인 독서회 회장 이연호는 황해도 안악 출신의 빈민으로, 해방 이후 빈민 목회 활동을 한 특이한 사례였다. 참가자들은 계급이나 지역적 연고성보다는 학생으로서 민족 대의에 헌신하는 차원에서 상록회를 조직했다고 판단된다.
Q : 상록회는 왜 '무력감과 적개심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조직'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A : 중앙에서 보면 상록회는 민족주의 비밀결사의 하나이지만 상록회 사건은 춘천이라는 지역이나 학교 단위에서 내적 연계성이 있다. 1935년 동맹 휴학, 1941년 불량 학생 검거 사건과 지역 내에서 내적으로 연계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5년 동맹 휴학 때 오카다라는 교사가 "조선인이 낫과 괭이를 들고 저항하더라도 일본 예비역 군인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고 발언을 했는데 이 때 3학년이던 남궁태는 적개심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상록회라는 비밀결사는 무력감과 적개심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37년 당시 3학년이던 이란 등은 1941년 <춘천중학(현 춘천고) 불량학생> 사건으로 일본인 학생들과 직접 충돌했는데, 이는 1935년에 느낀 무력감이 현실적 힘으로 되살아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Q : 상록회 주동자들의 사상 경향을 민족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나?
A : 상록회 참가자들에 대해 살펴보면 용환각과 조규석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사회주의를 반대했고 남궁태는 기독교인이지만 재산 균등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찬성했다. 즉 상록회는 민족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지만 외부 압력이나 현실적 상황에서 좌우 갈등 할 수 있는 균열의 요소가 존재했다. 이런 균열의 요소가 해방 후 이찬우와 남궁태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이찬우는 해방 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후 우익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국회의원 출마 경력도 있다. 남궁태는 강원일보 전신인 팽오통신 창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등 좌익 성향이었으며 6·25 전쟁 직후까지 활동했다. 한편 상록회 회원들은 모두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훈장을 받았는데 남궁태만 제외되었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해 6·25 전쟁 당시 사망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사망에 좌우익 갈등에 원인이 있고 그것이 춘천 지역사회의 트라우마의 하나가 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Q : 상록회 관련 연구가 그동안 부진했던 이유는?
A : 첫째는 자료적 측면이다. 2000년대 초반에야 관련 자료들이 번역되거나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강원도 경찰부가 올린 자료들과 재판 기록 등이 2005년경 책으로 출간됐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졌다. 이전에는 일본어 초서로 된 재판 기록을 해독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가 진척되지 못했다. 자료가 해독돼 책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연구가 가능해졌다.
둘째는 지역사적 맥락, 즉 지역 내 트라우마 존재 문제이다. 일제강점기는 항일운동으로서 정리되지만 이것이 해방 이후까지 연계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위에서 말한 6.25 전쟁시 남궁태 등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트라우마' 존재 때문이 아닐까. 이건 하나의 추정이다.
Q : 상록회와 지역사회 운동 간의 연관성에 대한 평가는?
A :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춘천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살펴보면 일제시대 때도 사회주의 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박유덕이라는 인물이 화천과 춘천 일대에서 공산당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으나 1930년대에 체포된 뒤 소식이 끊겼고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염경환이라는 청년 학생 운동가도 있었으며 이란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이란은 1941년 춘천고등학교 출신으로 아버지 이임순은 당시 요선동에서 관동의원을 했고, 원래 천전리 출신이다. 이임순은 해방 전 여운형을 만나 좌익 쪽으로 돌아섰으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정부장을 맡았다. 이임수는 이후 월북했다.
춘천에서는 해방 후 건국 초기까지 좌익 활동이 종종 있었으며, 6.25 전쟁 때 남궁태 이후 그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반독재 운동과 1987년 민주화 운동도 이어졌다. 하지만 중간 시기는 공백 상태였고 그 사이 지역에서는 순수한 우파 민족주의 운동만 부각되었다.
따라서 지역사회 운동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면 전체적인 좌우익 운동 전통 속에 상록회를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궁태가 혼자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당 사건'에 여러 사람이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 점에서 그러한 영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좌우익을 아우르는 전통을 찾아내고 해방 후 6.25 전쟁 때 단절된 이 전통이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그려져 온 것을 다시 복원하고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남상구 박사 "상록회 정신, 부조리와 싸운 젊은 용기로 기억해야"Q : 상록회 '구성원'들의 주요 특징은?
A : 상록회 사건은 1930년대 말 조선 사회가 직면했던 민족적·사회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극심한 민족 차별과 농촌의 피폐화가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조선 청년 학생들이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모색했던 것이 상록회 운동의 본질이다. 춘천 지역은 을미의병 등 일제에 맞서 항일 운동이 지속되어온 역사적 토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문조서에는 춘천의 지역적 특수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이 점은 향후 심층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주목할 점은 <상록회 사건 의견서 기록 제13호-128번>에 드러나듯이 상록회 구성원들이 조선의 명문가였다는 의식과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남궁태는 고구려 왕조 후손임을 자랑, 이찬우는 경주 이씨로 대신 십수 명 배출, 백흥기는 대신 후예 등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인식은 정치적 공간이 극도로 제약된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좌절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계층적 배경과 명문가 의식은 당시 식민지 조선이라는 정치적·사회적 공간의 극심한 제약 속에서 강한 좌절과 분노를 낳았으며, 이는 민족 해방과 자주적 미래를 위한 엘리트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각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상록회 구성원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선 민족을 계몽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강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일제의 문화 동화 정책과 억압적 지배에 맞서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상록회는 단순한 학생 운동이나 비밀결사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 엘리트로서의 자각과 시대적 사명감이 결합된 조직으로 이해될 수 있다.
Q. 상록회 사건이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이유는?
A: 상록회사건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가 한층 더 강압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드러난 대표적인 비밀결사형 항일학생운동 사건이다.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전국적 연대의 성격은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결사체를 구성하고 사상적 토대 위에서 항일의식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록회는 그 상징성과 역사적 가치를 고려할 때 학계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몇 가지 구조적‧시기적‧인식론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요인은 사건이 발생한 시기의 특수성이다. 상록회가 조직되고 검거된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전시 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통제를 대폭 강화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항일운동은 대부분 은폐되고 단절되기 쉬웠으며 일제의 강력한 정보 통제와 검열로 인해 관련 자료의 생산과 유통이 구조적으로 제약됐다. 상록회 또한 그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네트워크 확산이나 대중적 호응을 이끌어내기 어려웠고 그만큼 이후 역사 서술에서도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상록회가 지닌 비밀결사적 성격 역시 주목을 어렵게 만든 요소다. 광주학생운동처럼 공개적인 시위나 거리 투쟁으로 확산된 사건들은 시각적·정치적 파급력이 커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상록회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밀실적 조직 운영과 사상 교류를 중심으로 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비공개적 운동은 그 성격상 기록과 재현이 어렵고 이후에도 '구체적 실천이 결여된 사상적 교류'로 축소되기 쉬운 인식을 낳았다.
셋째, 신문조서 등 일본 경찰기관의 일방적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는 점도 학술적 조명의 걸림돌이 되었다. 상록회 관련 공식 자료는 대부분 일제 경찰의 조사 문서이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의 주체적 관점이나 활동의 맥락이 왜곡되거나 축소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서는 이들 문건을 비판적으로 읽고 상록회 참가자 개인의 회고록, 당시의 독서회 활동 기록 등 다양한 사료를 복합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상록회 내부에서 드러난 회원 간 이탈과 조직적 해체의 문제도 그 역사적 평가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요소를 근거로 상록회를 실패한 운동으로 간주하거나 지속성과 조직력 부족을 문제삼아 본질적 의미를 간과했다. 그러나 당대의 탄압 강도와 개인의 삶의 조건을 고려할 때 그러한 이탈과 해체 역시 식민지 현실의 한 단면으로 이해돼야 하며 오히려 상록회와 같은 시도의 용기와 정치적 결단은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결국 상록회사건이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이유는 단지 사건의 규모나 파급력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시대적 조건과 학술적 시각의 한계, 사료 접근의 제약, 그리고 운동 내부의 복합적 양상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향후에는 상록회의 역사적 의의를 재구성함과 동시에 조직 내부의 분열과 한계, 형기 이후 참가자들의 삶과 사회적 기억의 양상까지 포함하는 입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항일운동 사건을 조명하는 것을 넘어 식민지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이 현실의 부조리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Q : 상록회사건에 대한 향후 연구 방향은?
A : 상록회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점적인 연구 과제가 선행돼야 한다. 먼저 사건 당시 작성된 신문조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일제의 시각이 투영된 문서 속에서 실제 사건의 전개 양상과 참가자들의 진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형기를 마친 후 상록회 참가자들이 각기 어떤 삶의 경로를 걸었는지를 추적하는 연구도 중요하다. 이들의 해방 이후 활동, 정치적 성향의 변화, 사회적 위치 등을 분석해 상록회가 개인과 공동체에 남긴 장기적 영향을 조명할 수 있다.
춘천 지역 사회 및 국가 차원에서 상록회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려 했는지에 대한 문화기억적 접근도 필요하다. 지역 신문, 교육 자료, 추모사업 등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통해 사회적 기억의 형성과정을 분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록회 구성원들이 활동했던 독서회의 독서 목록이나 사상적 토대에 대한 연구도 병행돼야 한다. 이들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이 어떻게 민족의식과 실천으로 이어졌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이들의 사상 형성과 정치적 자각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이러한 다각적 연구는 상록회사건을 단순한 식민지 시기의 학생운동 사례가 아니라 당시 청년 지식인들의 저항과 사유의 궤적을 복원하는 작업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Q : 상록회에 관련해 남기고 싶은 말?
A : 상록회사건에 참여한 이들은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이후 약 10년이 지난 시기에 태어난 세대였다. 이들은 일상 곳곳에 스며든 민족 차별과 동화정책이라는 식민지적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했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했다.
특히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일본의 조선 통제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다.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려는 식민권력의 논의가 본격화되던 가운데 이들의 항거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제국의 정책 결정에 일정한 긴장감을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상록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시대의 부조리와 불의에 맞서기 위한 용기와 실천의 중요성이다. 아무리 억압적인 시대일지라도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적 책임감을 품은 이들의 작은 결단이 훗날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후세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5.06.26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