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의 명을 받아 피고인에 대한 범죄구성 요건과 정황 등을 직권으로 조사해 법관에게 보고하는 양형조사관이 형사재판에 사상 처음으로 증인으로 출석했다.
법원 소속 직원인 양형조사관은 재판장이 형사사건 피고인에 대한 형량을 선고하기에 앞서 검찰의 공소사실과 피고인에 대한 법정 신문 등을 통해서도 파악되지 않은 부분을 조사해 법관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검찰은 양형조사관제는 법적 근거가 없는데다 검증되지 않은 조사관이 수사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국민참여재판에 양형조사관 첫 증인 출석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홍승면)는 10일 술 취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존속상해치사)로 기소된 양모(남 25)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열고 변호인측 신청을 받아들여 법원 소속 사무관인 최모씨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그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한 법무부 소속 보호관찰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채택된 적은 있어도 법원 소속 양형조사관이 증인으로 채택돼 배심원 앞에서 신문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형조사관 최씨는 이날 변호인 신문에서 아버지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양씨에 대한 조사결과를 증언했다.
최씨는 "피고인 양씨의 학창 시절에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고, 할머니와 큰아버지도 양씨가 크게 뉘우치고 있어 선처를 바란다"고 조사 결과를 전했다.
최씨는 이어 "숨진 양씨의 아버지는 평소 술을 많이 마신데다 생계를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며 "사건 현장인 집도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열악했다"고 증언했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7명의 배심원들은 피고인 양씨에 대한 검사와 변호사 신문은 물론 최씨의 이날 증언도 참고해 재판부에 양형을 권고했다.
형량을 결정하는 양형은 재판장 고유의 몫이지만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이 재판장에 일정 수위의 양형을 권고하고 그간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의 양형 권고와 재판장의 실제 선고가 90% 이상 일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씨의 이날 증언은 실제 선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게 검찰쪽의 주장이다.
▲검찰, 첫 증인 채택에 강력반발
검찰은 법원이 양형조사관을 국민참여재판에 증인으로 채택한 것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재판정에서는 법률에 근거해 여러 가지 증거들이 현출돼야 하는데 양형조사관제는 법률적 근거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달 12일 대법원이 일선 법원이 별도의 조사관을 두고 피고인의 범죄동기 등을 수집한 뒤 양형을 위해 재판장에게 보고하는 양형조사관제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자 검찰은 당장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대검은 성명을 내고 "법원 직원의 조사 활동은 법률적 근거가 미비하다"며 "판결은 해당 사건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법원 소속 양형조사관이 증인으로 처음 채택돼 배심원 앞에 서자 검찰과 법무부는 적잖이 당황하는 분위기다.
법무부 관계자는 "양형조사관제에 대한 법무부와 검찰의 기존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며 "국회에서 형사소송법 개정안 등이 논의 중인데 굳이 양형조사관을 증인으로까지 채택한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법원이 법원조직법을 근거로 조사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관련 법령에는 조사관을 둘 것만 명시돼 있을 뿐 임무 등은 명시돼 있지 않다"며 "조사관 제도를 합법화 시키려는 법원의 시도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법정에서 피고인 신문을 통해 양형 관련 조사를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양형조사관 활동을 허용하는 것은 검찰에 대한 수사권 침해"라고 덧붙였다.
현재 검찰은 양형조사관 제도가 법원 인사적체 해소와 일자리 창출 등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곱지 않은 눈총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법원은 검찰과 피고인 사이에서 가장 중립적으로 양형 관련 조사를 할 수 있는 게 법원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유무죄를 다투지 않는 사건의 경우 양형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며 "형사사건의 경우 법원이 검찰과 변호인 가운데서 범죄 구성요건 등 양형사유를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조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법원의 양형조사관제 운용에 당장 성명 등으로 대응할 계획은 없다면서도 증인채택 등이 반복될 경우 수사권 침해 방어 차원에서 일정 수위로 맞대응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양형조사관제를 놓고 향후 법원과 검찰의 날선 대립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