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페메 엉덩이만 보고 뛰세요"
마라톤 대회에 첫 출전하는 아마추어 러너들에게 코치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페메(페이스 메이커) 뒤에 딱 붙어 뛰면 맞바람도 피할 수 있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속도 계산할 필요없으니 오로지 뛰는데만 집중할 수 있어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뛰는 거리가 늘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상체가 뒤로 젖혀지느데, 페이스 메이커 엉덩이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이를 방지할 수 있다.
페이스 메이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프로 선수들의 기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지난 201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이네오스 1시간 59분 챌린지'라는 이벤트성 대회에서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가 1시간 59분 40초 2를 기록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 2시간의 벽을 허물었다.
대회 주최 측은 킵초게가 2시간을 돌파하도록 페이스 메이커를 무려 41명 고용했다. 한 팀당 7명으로 5팀을 꾸려 번갈아 가며 페이스 메이커로 나서게 했다. 5명은 예비로 대기했다.
한 팀 7명이 페이스 메이커로 뛸 때는 킵초게 앞에 5명이 V자 대형을 이뤄 바람을 막아줬다. 이런 대형은 바람 저항을 무려 50%나 줄여주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머지 2명은 특이하게 킵초게 뒤에서 좌우로 나란히 달렸다. 킵초게 속도가 떨어질 경우 일종의 등을 떠미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대규모 페이스 메이커 덕분에 킵초게는 2시간 벽을 깼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남자 마라톤 풀로스 세계 신기록은 케냐의 켈빈 킵툼이 2023년 시카고 마라톤 대회에서 세운 2시간 35초로 여전히 '마의 2시간'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당시 대회에서도 페이스 메이커가 투입됐지만 여느 대회처럼 그룹별 페이스 메이커가 중간 교체없이 30Km까지만 뛰었다. 나머지 구간은 킵툼 스스로 달려야 했다.
선수들이야 아무 생각없이 페이스 메이커 뒤를 따라 뛰기만 하면 된다지만 페이스 메이커들은 육제적, 장신적 극한을 창조적으로 돌파해야 한다.
맞바람을 이겨내고 속도를 유지하는 강한 돌파력과 어느 구간을 얼마의 속도로 달려야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를 미리 가늠하는 전략적 사고. 선수를 밀고 당겨 전략적 속도에 맞추는 협상력이 필요하다.
남북 관계에 있어 미국에게 '선수' 자리를 넘겨주고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자처한 이재명 정부가 최근 페이스 메이커 내 주도권을 놓고 내홍을 겪었다.
남북 관계는 대북 제재와 연결되는만큼 자신들이 나서야 한다는 외교부에 대해 통일부가 발끈하며 별도의 대미 협의 채널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
정부 내 자주파와 동맹파 충돌 논란이 일고 전직 통일부 장관들까지 성명을 발표하자 이 대통령이 나서 교통 정리를 했다.
지난 주 통일부와 외교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선제적으로 주도적으로 남북 간에 적대가 완화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고 그런 역할은 역시 통일부의 역할"이라고 통일부에 힘을 실어줬다.
남북 관계에 있어 외교부 보다는 통일부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문재인 정부 당시 외교부 중심의 한미 협의 채널인 '한미워킹그룹'의 실망스런 경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초기 판문점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한반도 화해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렸지만 한미워킹그룹은 이에 찬물을 끼얹었다. 북한에 의약품 '타미플루'를 인도적 지원하는 것도 운반수단인 트럭이 대북 제제 품목에 해당한다며 불허하는 등 남북교류협력사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결국 남북관계가 급냉을 넘어 파탄 직전까지 온 배경에 한미워킹그룹을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연합뉴스북한을 상대로 밀고 당기기를 하는 일은 외교부 보다는 통일부가 제격이다.
남북 관계의 경로와 시간표를 구상하는 전략적 사고도 통일부가 외교부에 앞선다.
다만 한반도 문제는 미일중러 주변 4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을 화해 협력 평화의 장으로 이끄는 역할은 아무래도 통일부 보다는 외교부가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양 부처가 불협화음을 뒤로 하고 페이스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선수의 기록은 단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페이스 메이커 본인이 처음으로 피니시 라인을 밟는. 흔치 않지만 아예 없지도 않은 결실도 맞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