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백화점의 한산한 31일 오후. 박요진 기자'다사다난'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함이 느껴지는 2024년.
이달 들어서만 12·3 내란사태에 이은 탄핵 정국, 사상 최초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 제주항공 참사 등이 잇따르면서 올해 세밑 국민들은 우울을 넘어 암울하다.
각종 사건·사고가 미처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상황인데 내년 경기에 대한 부정적 전망까지 더해지면서 좀처럼 희망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목표 금액 60%밖에 못 채워"…상가에 붙은 '임대' 문구
서울 한 식당가에 위치한 상가에 붙은 임대. 박요진 기자한 해가 끝날 무렵을 뜻하는 '세밑'은 백화점이나 아웃렛 등 쇼핑업계의 전통적 대목 중 하나여서 이 시기 쇼핑업계는 일 년 중 가장 화려하게 건물 내·외부를 꾸미고 고객을 맞는다. 직장인들은 한 해의 마지막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아껴뒀던 휴가를 쓰곤 했다.
하지만 31일 서울 한 백화점과 쇼핑몰은 너무도 한산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연신 반짝이고 있었지만 연말 분위기는 실감할 수 없었다. 이 백화점에서만 1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는 40대 황모씨는 "매해 경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끼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다르다"고 말했다.
인근 백화점에서 일하는 김씨 역시 "이번달 회사에서 목표한 금액이 있는데 60%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12·3 내란사태에 제주항공 참사가 고객들의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모처럼 백화점을 찾았다는 60대 최모씨는 "살면서 올해처럼 집 밖을 나가는 것 자체를 주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경기도 어렵지만 차분하게 쇼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얼마 만에 백화점에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맘 때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던 인근 상가에서는 '임대'라고 크게 써붙인 글씨도 심심찮게 보였다. 드문드문 그 앞을 지나는 시민들은 눈길을 줄 여유도 없이 두 손을 주머니에 꼭 꽂은 채 부산하게 걷기 바빴다.
이날 거리에서 만난 40대 한모씨는 "여러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올해처럼 크리스마스나 연말을 실감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12·3 내란사태와 관련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기는 했지만 이후 더 큰 갈등이 초래되는 것 같다는 게 한씨의 생각이다.
한씨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한 해를 정리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큰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사고를 꼽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尹 한 달 다되도록 혐의 부인…제주항공 참사·의정갈등
31일 오후 서울 또 다른 백화점에 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한 모습. 박요진 기자한밤 중 45년 만의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은 자신부터 탄핵 소추는 물론 내란 혐의를 한 달이 다 되도록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던 한덕수 국무총리 역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면서 야당 주도로 탄핵안이 가결됐고 최상목 경제부총리에 대한 탄핵 가능성도 언급된다.
시민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12·3 내란사태를 올해 발생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이모(15)양은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비상계엄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됐고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구로구 개봉동과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60대들은 12·3 내란사태와 함께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주항공 참사를 애도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들은 "올 한 해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사고로 가득했다"고 입을 모았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큰 노년층에서는 지난 2월 이후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 갈등이 언제쯤 해소될지 걱정하기도 했다. 양천구 목동에 사는 70대 최모씨는 "올해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말을 가장 많이 하고 들은 것 같다"며 "더 답답한 것은 지금도 의정 갈등이 언제쯤 해결될지 좀 잡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토로했다.
9명 숨진 시청역 교차로 교통사고…정치인 테러도 올해 발생
지난 7월 초 주말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9명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와 이재명·배현진 의원을 대상으로 저지른 테러를 충격적 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50대 배모씨는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가 올해 발생한 일이었는지 기사를 보고서야 회상하게 됐다"며 "시청역 교통사고도 그렇고 돌이켜보면 올해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해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고 강조했다.
지난 29일 제주항공 참사가 발생한 이후에는 SNS(소셜미디어)에서는 송년 모임이나 여행 소식 등의 일상을 전하는 게시물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 자리는 검은색 리본 등의 추모 게시물들로 채워졌다. 암울한 세밑에 상당수 국민들은 여전히 소중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거나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음껏 손뼉 치며 기뻐했던 일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과 응원하는 야구팀의 우승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한 시민의 이야기는 우리 국민들이 올 한 해를 얼마나 가혹하게 보냈는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