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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또 다른 비극의 서막…대를 거친 악몽 어디까지 이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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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순, 또 다른 비극의 서막…대를 거친 악몽 어디까지 이어졌나

    편집자 주

    74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은 전남 여수 제14연대가 제주도민을 무력 진압하라는 정부 명령에 항명하며 여순사건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전남 여수‧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9일간의 악몽은 그 이후에도 전남 광양과 구례, 전북, 경남 등 지리산 일대에서 민간인에 대한 군경의 무자비한 학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당대의 희생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고, 유가족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만이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습니다.
    이에 전남‧전북CBS는 지리산 권역에서 경계를 가로지르며 발생한 민간인들의 희생과 그로 인한 한(恨),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해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길을 조명하는 공동특별기획 6부작 '여순의 또 다른 진실, 지리산 킬링필드'를 마련했습니다.

    [전남‧전북CBS 공동특별기획 6부작]
    여순의 또 다른 진실, 지리산 킬링필드

    ▶ 글 싣는 순서
    ①여순, 또 다른 비극의 서막…대를 거친 악몽 어디까지 이어졌나
    (계속)

    진상규명 위해 한자리에 모인 유족들

    "열두 살쯤이었을까 아버지가 일하는 우체국에 종종 놀러갔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 기억이지만 어버지가 사주셨던 국밥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9월 22일 전남 순천시문화건강센터에서 만난 구례군 마산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이제방(당시 35세)씨의 자녀 현식(86)씨는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이같이 추억을 꺼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가족과 함께 여순10·19항쟁전국유족총연합(이하 총연합) 창립총회를 찾은 그는 한평생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부친이 가족을 떠났던 1949년 3월 30일, 현식씨는 삼남매 중 막내 형순(74)씨가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의 무게를 대신해 왔다.
     
    여수와 순천, 구례 등 전남 동부권을 넘어 서울, 경남 등 전국 곳곳에 흩어진 또 다른 이름의 형식·형순씨들은 이날 창립총회에 모여 "진상규명을 위해 유족으로서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등 뒤에 숨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유족임을 앞세워서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억지를 부려서도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이제방씨의 자녀 현식(오른쪽)씨와 형순씨. 전남 구례군 마산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이제방씨의 자녀 현식(오른쪽)씨와 형순씨. 지난 9월 22일 전남 순천시문화건강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여순10‧19항쟁전국유족총연합 창립대회에서 유족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유대용 기자지난 9월 22일 전남 순천시문화건강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여순10‧19항쟁전국유족총연합 창립대회에서 유족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유대용 기자

    시험대 오른 이승만 정권, 민간인 학살로 통치 능력 과시 

    4·3사건이 일어난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반기를 든 건 여수 국군 제14연대였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4연대는 동족에게 총을 겨누기를 거부하며 봉기에 나섰고 곧바로 여수경찰과 철도경찰을 물리치며 여수를 점령했다.
     
    이후 주력군인 600여 명의 병사들은 여수역에서 5량 기차와 차량을 강제로 거둬 다음날인 10월 20일 오전 9시 20분, 순천으로 이동했다.
     
    10월 20일 아침 순천에 도착한 봉기군은 순천에서 경찰과 교전한 뒤, 이날 오후 순천을 점령했다.
     
    두 차례의 교전 끝에 정부군의 저지선을 뚫지 못한 봉기군은 다시 순천 일대로 퇴각한 뒤 곡성, 보성, 구례 등지로 흩어졌다.
     
    10월 21일 이후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UN으로부터 합법 정부로 인정을 받아야 했던 이승만 정부는 통치 능력을 보이기 위해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만주군 출신 장병을 투입했고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며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정부 토벌군에게 민간인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척결의 대상이었다.
     
    주철희 여순사건위원회 위원은 "여순사건이 정부의 통치 능력 시험대로 쓰이면서 굉장히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고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갔더니 한국전쟁이 터졌다"며 "정부는 입산자들이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북쪽을 지지하거나 가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에도 한동안 군경의 민간인 학살이 지속된 이유다"고 언급했다.
     
    10월 27일 정부군이 여수를 탈환하고 여수·순천지역의 진압 작전이 마무리 되자 정부군은 또 다시 전북 남원, 전남 구례,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 권역의 봉기군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후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민간인 학살 피해는 여수와 순천을 비롯해 경남 서부, 전북까지 곳곳으로 확산됐다.
     
    특히 구례, 그중에서도 산동면, 간전면, 토지면 등 지리산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의 피해가 컸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이 활동하면서 구례에서만 3천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경모 작가의 여순사건 기록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이경모 작가의 여순사건 기록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14연대와 지역민은 왜 들고 일어섰나

    지리적 특성과 함께 한국전쟁 등 시대적 상황까지 엮이면서 당시 민간에 대한 국가 폭력은 여순사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았다.
     
    이러한 배경에 주 위원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당시 한반도 정세에 주목했다.
     
    그는 "여순사건은 14연대 군인들의 단순 봉기로 지역민들이 일어선 것이 아니다"며 "그동안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국가가 할 일들을 하지 못하면서 발생된 문제였다"고 짚었다.
     
    이어 "해방 이후 한반도 모든 민중은 분단이 아닌 자주독립국가를 원했지만 느닷없이 외부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분단됐다. 사회적으로는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이 군경, 정부, 경제 권력을 장악해 민중의 불만이 컸을 것"이라며 "14연대 군인의 봉기를 도화선으로 민중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고 덧붙였다.
     

    여순에서 멈추지 않은 학살… 남은 이들 아픔도 '닮은꼴'

    여순사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 양상이 비슷하다는 점도 짚어야 할 부분이다.
     
    일찍이 여읜 부모의 빈자리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가난과 연좌제로 채워질 뿐이었다.
     
    구례군 간전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신종우(당시 41세)씨의 아들 영식(76)씨는 아버지가 희생된 섬진강 지류의 간문천변을 가리키며 부친을 떠올렸다.
     
    여수에서 무장봉기한 뒤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14연대 군인에 대한 진압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1월, 당시 두 살이었던 영식씨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소를 키우던 그의 아버지는 같은 해 11월 24일 반군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아 군인들에게 끌려갔고 간문초등학교로 연행된 뒤 간문천변에서 사살됐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신종우씨의 아들 영식씨가 아버지가 희생된 섬진강 지류의 간문천변을 가리키고 있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여순사건 희생자 고(故) 신종우씨의 아들 영식씨가 아버지가 희생된 섬진강 지류의 간문천변을 가리키고 있다.  
    경남 산청군 시천·삼장면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 정태인(당시 36세 추정)씨의 자녀 맹근(78)씨의 삶도 비슷하다.
     
    맹근씨는 "학교 선생이 꿈이었는데 중학교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달랐을 것"이라며 "소나무 속살에서부터 나락 껍데기까지 안 먹어본 게 없다. 못 죽어서 살았던 때다"고 전했다.
     
    여순사건의 여파가 전남 동부권을 넘어 지리산권 전역으로 퍼지던 1949년 7월 23일 당시 이장을 맡았던 맹근씨의 부친은 빨치산에게 부역한 적이 있는 주민들을 상대로 자수하라는 국군의 전달사항을 전하다 몇몇 주민과 함께 학살됐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주민들은 총부리를 겨눈 빨치산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 게 목숨을 앗아갈 죄가 될지 꿈에도 몰랐다.
     
    가족들은 부고를 접하고도 군인들의 감시가 심해 시신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국군이 한창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하던 때였다.

    강성호 순천대 대학원장은 마을 공동체적 양상이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 주홍글씨로 작용하면서 희생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희생자 가족, 유족들에 대한 인식 역시 사회적 배경만큼이나 마을 내에서도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알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듯 서로 닮은 상처를 안게 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들.
     
    여순사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지역의 문제가 아닌 시대의 흐름으로 보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향해 자행된 차별적 국가 폭력에 대해 냉철한 평가를 내려야 할 때다.

    ※이 영상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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