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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기만 하면 가장 소수의 이야기는 공론화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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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기만 하면 가장 소수의 이야기는 공론화될 수 없어요"

    [노컷 인터뷰] '앨리스 죽이기' 김상규 감독 ②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한 카페에서 '앨리스 죽이기' 김상규 감독을 만났다. (사진=㈜인디플러그 제공)

     

    지난 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앨리스 죽이기'는 김상규 감독의 첫 영화다. 실제 일어난 일이나 실존 인물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에 매력을 느낀 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였다.

    '앨리스 죽이기'는 2014년 일어난 신은미 씨 '종북 매도' 사태를 통해 당시 한국 사회를 들끓게 만든 '레드 알레르기' 반응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김 감독은 대학생 때였던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당시 중학생이던 신효순-심미선 학생이 경기도 양주 갓길을 걷다가 이동 중이던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진 사건) 이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를 보고 '영상의 힘'을 느낀 그는,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현장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싶어 독립 다큐멘터리스트의 길을 택했다. 영화를 좀 더 잘 만들어보고 싶어서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했고, '앨리스 죽이기'로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앨리스 죽이기'를 찍으면서 레드 콤플렉스(극단적인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는 김상규 감독을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한국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목격하다

    신은미 씨가 53일 동안 겪은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촬영하면서 '기록자' 입장으로서 충격이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 감독은 "예전부터 그런 순간을 좀 눈여겨봤던 것 같다"라고 답했다.

    2000년 6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났다. 김 감독은 이후 금강산 관광도 가 봤다. 사회가 더 나아지는 것을 '체감'했던 김 감독은 2008년 이후 남북 관계가 급격히 달라지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고 전했다.

    김 감독은 "2008년 이후 금강산 관광을 비롯해 남북 간 여러 교류가 끊기고 적대적인 언사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서 대통령 한 명만 바뀌어도 나라가, 정서가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걸 느꼈다"라고 말했다.

    이어, "통일이 의제로 나오다가도, 금세 냉·온탕을 오가는 걸 보면서 결국 분단 이후 서로 적대시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려고 하더라. 합리적으로 소통하고 교류하려는 민간의 의지마저도 가로막고, 철저하게 국가 중심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한 것도 문제라고 봤다"라고 밝혔다.

    신은미(사진 가운데) 씨와 황선 씨가 신은미 씨 북한 여행기와 관련해 북 콘서트를 진행한 모습. 두 번째는 2014년 12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종북 콘서트'라는 단어를 쓰는 모습. 세 번째는 신은미 씨의 호송차를 뒤따르는 언론 매체의 모습 (사진=㈜인디플러그 제공)

     

    김 감독은 "영화에서 국가보안법을 전면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상상을 했을 때 우리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국가보안법의 틀에 걸려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비단 불온한 상상이 아닐지라도, 남북이 만나서 대화했으면 하는 주장마저도 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언론의 특정한 의도 하에 이것을 왜곡하고 과장한다면… 누구라도 그런 틀 안에서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상상조차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을 돌아보다

    김 감독은 '앨리스 죽이기'에서 자신의 견해를 뚜렷이 내보이지 않았다. '앨리스 죽이기'는 신은미 씨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을 차분하게 보여줄 뿐이지만, 관객들은 당시 한국 사회의 '광기'와 '우스꽝스러움'을 목격할 수 있다.

    '앨리스 죽이기'를 준비하면서 김 감독은 2014년 전후로 한국 사회 정치적 배경을 갖고 타임라인을 만들었다. 그 당시를 조금 더 면밀하게 바라보고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김 감독은 "2014년에 종북 논란이 왜 발생했을까? 단순히 신은미 씨가 토크 콘서트를 했기 때문인가? 그 자리에 누군가 와서 몰래 촬영해서 TV조선에서 보도됐던 건 그냥 우연일까? 등을 생각해 보면 시간을 1년 반~2년 정도 돌려볼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내란 음모 의혹에 관해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라며 "안보 불안을 자극하기 위해서 하나의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종북 콘서트를 한다'는 워딩을 통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종북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고 바라봤다.

    또한 김 감독은 '신은미 사태'를 통해 아직 우리 사회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는 "국가보안법은 헌법이 규정한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뛰어넘는 법 같다. 북한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아주 낡은 법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만약 국가의 존립을 흔들리게 한다면,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 가능하지 않나.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이 핵심"이라며 "저도 (신은미 씨를 찍으며)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이걸 찍어도 되나?' 하고 자기 검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 자꾸 생각하게 됐다"라고 토로했다.

    김 감독은 "입을 틀어막고 처벌하거나 자유로운 왕래를 막는 데 국가보안법이 이용되는 걸 보면서,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진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라며 "내가 가진 어떤 것에 대한 혐오나 레드 콤플렉스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신은미 씨의 토크 콘서트를 방해하기 위해 모인 세력들. 아래는 이순실 외 뉴코리아여성연합 일동이 지난 2014년 12월 1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황선·신은미는 북으로 가라'라고 주장하는 모습 (사진=㈜인디플러그 제공, 노컷뉴스 자료사진)

     

    ◇ 공대생, 다큐 감독이 되기까지

    김 감독은 기계공학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전자공학으로 졸업한 공대생이었다. 대학 때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로봇 만들기'였고. 그러던 어느 날,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효순이-미선이 사건이었다.

    중학생 두 명이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에 김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 김 감독은 "무고한 국민이 죽었는데도 합당한 주장을 하지 못하고 약소국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건, 국가 간 불평등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거슬러 올라가면 분단에 그 출발점이 있다고 봤고, 이후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에 대해 자료를 많이 찾아봤던 것 같다"고 전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김 감독은 대학 때 영상 동아리를 만들었다. 사회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만들었고, 무척 열심히 활동했다.

    왜 '영상'에 꽂혔는지 묻자, 김 감독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 때문"이라며 웃었다. 그는 "드라마 대사 하나에도 작가의 의식과 철학이 담겨 있는 걸 보고, 영상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감동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영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라고 부연했다.

    처음에는 극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스트가 되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 생중계를 시작으로, 점차 '현장'에 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 잘 만들어 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가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극영화는 결국 혼자 하기에는 어렵다. 다큐멘터리는 제가 혼자 발로 뛰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독립 다큐멘터리를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돼서 좋아요. 보통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들하고만 의견을 교류하게 되잖아요. SNS에서는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를 응원하는 소리만 듣게 되고, 그게 굳어져 진보든 보수든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다큐 작업을 하면서는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왜 그 사람이 그런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이 굉장히 재밌었고요. 지금까진 관심 있는 것만 봤다면 이제는 다른 편에 있는 사람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되더라도 그런 시도를 꾸준히 하고 싶어요."

    지난달 22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다큐멘터리 '앨리스 죽이기'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신은미 씨는 내년 1월까지 입국 금지 상태여서 화상으로 기자간담회에 참여했다. 앉아있는 사람은 김상규 감독 (사진=㈜인디플러그 제공)

     

    미디어 환경이 나아지고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커진 건 사실이다. 김 감독은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좀 더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금기시한 것을 다루거나, 그동안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상식인지 사회적인 물음을 계속 던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라며 요즘은 한국사회의 '갑질'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이런 이야기도, 저런 이야기도 같이 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앨리스 죽이기'는 개봉 전부터 국내외 영화제에서 먼저 주목한 작품이기도 하다. 제23회 인디포럼 장편신작전, 제5회 춘천영화제, 제23회 서울인권영화제, 제6회 디아스포라영화제를 비롯해 캐나다(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미국(샌디에이고 아시안영화제) 등에 공식 초청됐다.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에서 용감한 기러기상, 제18회 인디다큐페스티발 국내 신작전 관객상을 받았다.

    김 감독은 "영화제에서 보신 분들의 평은 나름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편이었는데 영화 개봉한다고 했더니 댓글 별점 테러를 당하더라.'북한 찬양하는 영화' 이런 식으로. 거기서 5년 전 모습의 일부가 다시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신은미 씨를 손가락질했던 분들도 영화를 보시고 충분히 당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또 다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은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대의명분을 너무 좇다 보니까 그동안 외면하고 억눌러 왔던 게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남북관계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문제도 그렇고,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 억눌려왔던 게 있는데 그런 방식의 접근이 요즘 시대에도 바람직한가 싶은 거죠. 어떤 사람이 이념적으로 진보를 택하건 보수를 택하건, 거기에 따라서 모든 사안에 동일한 판단을 하진 않잖아요.

    다양성이 존중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큰 문제가 있으니 거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계속 억눌려왔던 걸 이야기할 기회를 미루기만 하면, 가장 소수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공론화될 수 없어요. 이런 이야기도 저런 이야기도 같이 할 수 있어야죠. 의견이 달라도 상대방 의견을 청취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대화의 과정이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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