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년' 백지영 "나쁜 건 빨리 망각, 기쁜 걸 찾아헤맸죠"[EN:터뷰]
원래 몇 주년을 기념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주변에서 '내년엔 25주년인데 정규 하나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었고, 고민 끝에 미니앨범을 내기로 했다. 앨범 단위로는 무려 5년 만인 여섯 번째 미니앨범 '오디너리 그레이스'(Ordinary Grace)가 2024년 12월에 나온 배경이다.
앨범 발매 일주일 전인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가수 백지영의 미니 6집 발매 및 데뷔 25주년 기념 라운드 인터뷰가 열렸다. 그동안 싱글이나 OST 작업을 주로 한 그는 "'이렇게 정성 들여 한 앨범'이 오랜만이긴 하다. 몇 주년이라기보다는 그런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규앨범을 만들기 쉽지 않은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백지영은 "만약 열 트랙(10곡) 정도를 한다 치면 10곡 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기가 사실 너무 힘들지 않나.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40~50%는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곡이고, (나머지는) 이 정도면 앨범 흐름에 어울린다, 변화의 시도다 해서 들어갔는데 그걸 (이번엔)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
작년부터 시동을 걸어, 송 캠프(여러 작곡가가 모여 작곡하는 방식으로 K팝 제작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를 진행했다. '한두 곡만 나와도 되게 타율이 높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숨은 빛'을 제외한 모든 곡을 송 캠프에서 건졌다는 백지영은 "제가 너그러웠던 건지 어쩐 건지"라고 웃었다. 전체적인 앨범 결과 맞지 않아 이번엔 못 실었지만 댄스곡도 있었다. "댄스를 좀 제대로 해 보고 싶은 마음"이라서 회사에도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타이틀곡 '그래 맞아'는 H.O.T. 강타와 싱어송라이터 히키, 프로듀서 클로저가 공동 작곡한 노래다. 백지영은 "'그래 맞아'는 사랑 노래지만 사랑보다는 인생이나 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많이 표현해 봤다"라며 이번 앨범을 "저한테는 되게 낯설면서도 되게 다정하게 느껴지는 그런 앨범인 거 같다. 기분이 아주 좋다"라고 전했다.
'낯설면서 다정한' 느낌이 든 이유를 묻자, 백지영은 "그동안 되게 가련하고 슬프고 처량하고 너무 많이 아픈 사랑의 마음을 노래했던 거 같은데 (이 노래는) 담담하면서도 연령이 느껴진다"라고 답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강타가 공동 작곡자로 참여했으나 처음엔 그 사실을 몰랐다. 백지영은 "그렇게 몰랐던 게 드라마틱했다"라고 털어놨다. 곡이 마음에 들어 '나, 이거 해야겠어!'라고 했을 때 강타 곡이라는 걸 알고 나서 "웬일이야? 어떡해! 나이 든 지금 이렇게 작업을 함께할 수 있지?" 했다. 녹음실에서 만난 강타는 "너무 부드럽고 되게 매너 있고 젠틀하고 칭찬이 넘치는 디렉팅"을 해 줬다고.
녹음 과정에서 운 이유도 들려줬다. '이윽고 마지막'이라는 가사가 눈물 버튼이었다. 백지영은 "'이윽고'라는 가사가 노래에 잘 쓰이지 않을 뿐더러, 되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뭔가를 만났거나, 기다리던 어떤 게 이윽고 나오거나 만들어졌다는, 어떤 결과물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라며 "제가 25년 정도 활동하고 막 별의별 일이 많았는데 '아! 이제 이윽고 이 노래랑 나랑 만났구나' 하는 마음이었다"라고 전했다.
백지영은 "저는 이 곡 사비(후렴)보다 벌스(도입)에 훨씬 더 감동을 많이 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인정하는 '그래 맞아'라는 구절이 나오고, 우리 정말 너무 아름다웠고 너무 만족했었고 너무 사랑했었고 너무 좋았지만 이윽고 마지막이라며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멜로디랑 너무너무 잘 맞았던 것 같다. 들으시는 분들은 사비나 제가 막 고음을 지르는 부분을 좋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저는 시작할 때가 제일 좋아서 그게 되게 새로웠다"라고 설명했다.
'그래 맞아'의 도입부는 한층 힘을 덜어냈다. 백지영은 "(힘을 빼는 게) 저한테는 더 어렵다. 제가 담담하게 부른다고 부르는데도 좀 더 담담하게 불러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라면서도 "이 곡은 힘 빼는 게 힘들지 않았던 게 어떤 영화, 어떤 풍경보다 우리 아름다웠어 인정하고 힘을 빼는 가사여서, 이 곡에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벌스 부분 녹음이 굉장히 수월하게 끝났던 거 같다"라고도 덧붙였다.
뮤직비디오는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스위트홈' 등 다수 히트작을 연출한 이응복 감독이 맡았다. 그의 뮤직비디오 데뷔작이기도 했다. '스위트홈' 시즌 2에 출연한 남편 정석원이 이 감독과 인연을 맺어 우연히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는데, 이 감독이 백지영의 오랜 팬이라며 첫 뮤직비디오 작업을 한다면 백지영 곡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을 밝혔다고. '감독님 이름에 폐 되지 않을 명곡이 나온다면 언제든 부탁드리겠다'라고 했는데, 예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와 버렸다.
나나와 채종석이 연인 역할로 열연을 펼쳤다. 백지영은 "저희 메인 장면이 가장 뒷부분 잠수교 불꽃놀이"라며 "안무가 아닌 (동적인) 표현을 잘해야 하고, 몸을 잘 쓰는 능력이 있고 너무 나이가 많지 않으면서 예뻐야 한다는 조건이었는데 정말 B안이 없는 A안이 나나였다"라고 밝혔다. 나나에게는 직접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출연료도 이만큼밖에 못 줘' '감독님은 누구시고 이때는 날짜를 무조건 빼야 해'라고 솔직히 말했고, 거절해도 좋다는 전제를 깔고 갔다. '흔쾌히 수락했다'라는 배우 캐스팅 일화를 믿지 않았다는 백지영은 "나나는 진짜 맞다. '언니, 저는 무조건 합니다'라고 했다. 정말 너무 고마웠다"라고 돌아봤다.
남자 주인공은 최종 3인을 뽑은 상태에서 나나의 추천으로 채종석이 후보군에 포함됐다. 이응복 감독이 확정했다. 둘이 잘 어울리고 키 차이도 좋고 신선한 마스크라는 이유에서였다. 백지영은 "저는 사실 이렇게 좋은 스태프들과 이렇게 디테일한 뮤직비디오 작업을 처음 해 본다"라며 이응복 감독을 보고 '이렇게까지 작업하시는구나!' 하는 걸 "너무너무 많이 느꼈다"라고 고백했다.
이응복 감독은 '그래 맞아'라는 타이틀곡 제목을 지어주기도 했다. 강타가 지은 원제는 '연필'이었다. 백지영은 "너와 나의 뭔가가 쓰여졌고, 다시 쓰일 너와 나… 뭔가를 쓴다는 것 때문에 '연필'이라고 했던 건데 저희는 제목을 바꾸기를 원했다"라고 말해 일동 폭소가 터졌다.
이어 "이응복 감독님도 약간 '응?' 이런 느낌이 있으셨던 것 같다"라며 "'그래 맞아'였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과의 지난 과거와 현재를 '그래 맞아'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고 하셔서 저희 다 소름 돋았다"라고 전했다.
'오디너리 그레이스'에는 '그래 맞아'와 스트링 버전, '플라이'(Fly) '단잠' '숨은 빛'까지 총 5곡이 수록됐다. 백지영은 "사실 매번 어려운 거 같다, 어떤 게 좋은 거냐는 게. 일단 노래라는 게 부르는 사람을 조금 터치해야 하는 것 같다. 저 자신(의 만족)이 1번"이라고 운을 뗐다.
그동안은 백지영이 '부름 직한' 혹은 '잘할 것 같은' 곡, "그렇게 재미는 없지만 안정적인 노래"가 대다수였다면 이번엔 조금 달랐다. 백지영은 "분위기 자체가 뭔가 새롭고, 막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도 중간중간 굉장히 재밌는 코드 변화가 있다거나 멜로디나 가사가 아주 직감적으로 터치하는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곡이 많았다, 굉장히 운 좋게"라고 소개했다.
제일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내 귀에 캔디'(2009) 시절을 꼽은 백지영은 "그때 제가 제일 예뻤던 것 같다, 제일 날씬하고. 그땐 몰랐다. 내가 이랬다고?"라며 "지금도 제가 약간 심하지 않은 다이어트를 하는데 그때는 다이어트를 안 했다. 그런데도 그랬다"라고 답했다. 그는 "그땐 너무 가볍고 너무 상쾌했다"라며 "(지금은) 너무 내 몸에 쌓인 독소 같은 게 매일매일 느껴진다"라고 덧붙였다.
데뷔 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백지영은 "저는 그때 영상을 보지 않는다. 저 같지 않다. 그때 제가 너무 불만이 많아 보인다. 그 얼굴이나 표정을 보는 게 즐겁지 않다"라며 "야욕과 욕망! 이런 게 저는 느껴진다. 그게 너무 보기 불편하다"라고 해 좌중에 웃음을 선사했다. 이어 "뚜렷한 목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욕심쟁이였다"라며 "사람들한테 저한테 입혀준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애쓰느라 되게 편하지 않았던 상태였다"라고 기억했다.
1999년에 데뷔해 25년 활동한 백지영. 위기감은 없었는지 묻자, "저희 회사 직원들은 있었던 것 같다"라고 답해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의 웃음까지 끌어냈다. 그는 "저 망한 음원도 되게 많다. 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이 못 불러보고 지나간 것, 야심 차게 준비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안 될 수 있지? 하는 것도 있고"라고 밝혔다.
20주년 앨범을 두고, 백지영은 "너무 사랑하는 앨범이지만 사실은 그때 많이 충격받지 않았다"라며 "저와 스태프들이 생각하지 못한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저는 아니지만 스태프들은 데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재조명되길 바라는 곡은 당시 타이틀곡 '우리가'인데, 백지영은 "제가 열창하는 스타일인데도 그렇게까지 열창하는 노래는 없는 거 같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고 소개했다.
긴 시간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 질문에 백지영은 짧게 한숨을 쉰 후 "타고난 성향이 무던하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좋은 날은 그렇게 나한테 영향을 많이 안 주는데 나쁜 일은 영향을 많이 주지 않나. 그 데미지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으면 기다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은 성향이어서 나쁜 건 빨리 망각하고 좋고 기쁘고 평안했던 걸 찾아 헤맸던 거 같다"라며 "부모님이 저를 그렇게 낳아주셨고 항상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제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던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 성향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라고 바라봤다.
몇 살까지 무대에 서겠다, 하는 목표가 있을까. 그는 "옛날에는 너무 애쓰지 말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그만해야지 했다. 원래 퍼포먼스 가수로 시작했으니까"라며 "패티김, 나훈아 선배님 공연은 이제는 너무나 국보 같은 느낌 아니냐. 저도 한 번 국보급 가수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 나이까지 제가 설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무대에 오래 서고 싶다. 그건 아무한테나 허락되지 않는 영역인 것 같다"라고 밝혔다.
2024.12.03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