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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학살의 시작' 제주 관덕정…비극의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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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학살의 시작' 제주 관덕정…비극의 기억은 없다

    [4.3, 기억과 추억 사이 ⑧]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
    기마경찰 말발굽에 치인 어린이…항의 군중에 총 겨눈 경찰
    일반인 14명 사상…유족들 "3.1절 기념 시민에게 어떻게 총을 쏘나"
    3.10 총파업 이후 미군정 강경진압 이어지자 4.3 비극 시작
    현재 상업 중심지로 거듭…발포사건 안내판 어디에도 없어

    제주 관덕정. (사진=고상현 기자)

     

    수만 명 학살이 자행된 제주 4.3의 도화선인 3.1절 발포 사건. 당시 경찰이 시위 군중을 사격했던 관덕정 앞은 현재 그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안내판도 없어 4.3의 중요한 사건은 외면당하고 있다.

    ◇ '3.1절 기념' 시민들에게 총 겨눈 경찰…14명 사상

    7일 오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관덕정. 조선 시대 군사훈련 건물인 이곳 앞으로 많은 관광객과 도민이 오가고 있었다. 제주시의 중심가인 관덕정 주변에 들어선 동문시장, 지하상가 등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4.3 직전에도 관덕정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모두 이전하고 없지만, 제주읍사무소, 법원, 제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이 밀집해 있었다. 또 관덕정 앞에 큰 시장도 섰고, 집회도 자주 열렸다.

    제주4.3의 도화선이 됐던 3.1절 발포사건 역시 많은 사람이 관덕정 앞을 지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1947년 인근 북국민학교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행진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쏜 것이다.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이며 쓰러졌는데 경찰이 아무런 조처 없이 그냥 지나가자 사람들이 항의했고, 경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관덕정 옆 제주경찰서 망루에 있던 경찰이 사람들을 직접 사격해 도민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공포 사격조차 없었던 터라 과도한 진압이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송영호(84)씨. (사진=고상현 기자)

     

    이날 만난 송영호(84)씨의 아버지도 3.1절 발포사건으로 관덕정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기념식에 참가한 후 귀가하다가 총을 맞은 것이다. 12살이었던 송 씨는 인근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송 씨는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라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경찰이 같은 국민에게 총을 겨눌 수 있나. 아버지 총상을 보면 팔과 옆구리가 관통됐다. 조준 사격이 아니면 이런 총상이 나올 수 없다. 경찰이 사과하지도 않았다"고 한탄하며 말했다.

    아버지를 잃은 송 씨는 이듬해인 1948년 4.3 광풍이 몰아치면서부터는 도남리 마을 집이 군경에 의해 불에 타 사라지고, 큰 형과 누나를 잃었다. 4.3 이후 송 씨는 막냇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며 힘든 삶을 살았다.

    "죽지 못해서 살았다. 살기 위해서 학교도 못 다니고 남의 집 머슴 일이나 넝마주이를 하며 고통스럽게 살았다"고 말한 뒤 송 씨는 한참을 "4.3이 원망스럽다"고 넋두리를 늘어놨다.

    ◇ '수만 명 학살' 4.3의 도화선 3.1절 발포사건

    송 씨의 아버지를 비롯해 일반주민 6명의 목숨을 앗아간 3.1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도에는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경찰 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이 진행됐던 것이다.

    총파업은 도내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경찰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을 대거 제주로 보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고, 테러와 고문치사 사건이 잇따랐다.

    가뜩이나 극심한 흉년, 대규모 실직 난, 친일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부정부패 등으로 민심이 흉흉했던 터라 제주사회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4.3 사건이 시작됐다. 이후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수만 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현재 복원된 제주목 관아 자리엔 4.3 당시 제주경찰서가 있었다. (사진=고상현 기자)

     

    애초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나서 제대로 수습을 했더라면, 미군정이 민간인에게 총을 쏜 경찰에 책임을 물었더라면 4.3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3.1절 발포사건은 4.3의 중요한 사건이다.

    허영선 제주4.3연구소 소장은 "3.1절 발포사건이 없었다면 제주도 민심이 폭발하지 않았다. 순수한 시민들이 3.1 기념식을 했던 것인데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총파업 등이 이어졌고, 그러다 4.3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상업 중심지로 거듭난 관덕정…비극의 기억은 외면

    3.1절 발포사건 현장인 관덕정 인근은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덕정뿐이다.

    3.1절 기념식에 참가한 시민들의 행진이 있었던 광장은 왕복 4차선 도로가 깔렸고, 경찰 발포가 이뤄진 제주경찰서엔 제주목 관아가 복원됐다. 송 씨의 아버지가 총탄을 맞았던 곳은 빌딩이 들어섰다.

    지금은 제주시 상업지구 중심지로 변한 관덕정 인근 모습. (사진=고상현 기자)

     

    그 주변으로 지하상가, 칠성통 상가거리 등이 조성되며 제주시의 대표적인 상업지구 중심지로 거듭났다. 특히 더 많은 관광객과 인구를 끌어들이기 위해 해마다 많은 예산이 투입돼 인도 정비 사업 등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4.3의 도화선이었던 3.1절 발포사건을 알리려는 노력은 없었다. 관덕정 주변 어디에도 발포사건 관련 안내판조차 없는 것이다. 간간이 민간단체에서 4.3 관련 행사를 열고 있을 뿐이다.

    4.3 70주년이었던 지난해부터 4.3의 전국화를 위해 저 멀리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3 기념행사를 열고 있지만, 정작 4.3의 원인이 된 3.1절 발포사건 현장은 70년 넘게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있다.

    관덕정 인근에서 해외 관광객들이 버스에 내리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이들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현재 관광지로 변한 그 무덤엔 4.3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이가 제주에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지만, 71년 전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CBS노컷뉴스는 매주 한차례씩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4.3 학살 터를 소개하며 4.3의 비극을 기억하겠습니다. 여덟 번째로 4.3의 도화선이었던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한 제주 관덕정을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오늘도 어머니 유해 위로 비행기 뜨고 내린다
    ② 피로 물들었던 모래사장 지금은 제주 관광명소로
    ③ 대량학살 자행된 제주 정방폭포…지금도 울음 쏟아내다
    ④ 4.3 학살 흔적 지워지는 제주 성산일출봉
    ⑤ '마을 청년 한꺼번에 학살'…한(恨) 많은 제주 표선백사장
    ⑥ 무고한 주민 희생된 '죽음의 길', 지금은 제주 올레길로
    ⑦ 학살 기억 묻히고, 이름마저 빼앗긴 '제주 도령마루'
    ⑧ '4.3 학살의 시작' 제주 관덕정…비극의 기억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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