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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차별을 견뎌온 자이니치의 눈물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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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차별을 견뎌온 자이니치의 눈물을 기록하다

[신간] <일본제국 vs.자이니치:대결의 역사 1945~2015> 이범준 지음

사진=교보문고 제공

 

자이니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과 후손을 말한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했기 때문에 일본에 살게 된 것이다. 자이니치는 조선어 금지라는 식민지 역사를 거쳐 일본 사화의 배타적 정책을 겪어왔다.

자이니치 사회에서 우리말 공동체는 거의 사라졌다. 조선학교가 마지막 남은 공동체이지만 해마다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자이니치가 우리말을 못 하는 것은 언어공동체가 붕괴됐기 때문이고, 배경에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차별이 있다.

자이니치는 언어와 이름을 잃고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일본 이름을 쓰는 것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보이기 위해서다.우리말을 못하기 때문에 한국인을 만나도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아니, 한국적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국적만은 온갖 어려움을 참아가며 유지하고 있다. 주민표에 적힌 조선·한국 표기는 가족 이와에는 아무도 모른다. 왜 그럴까. 자이니치들은 무엇을 위해 국적을 악착같이 유지하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45년 해방 이후 자이니치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일본제국 vs.자이니치:대결의 역사 1945~2015>(이범준 지음)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지난 70년 동안 우리는 북조선의 침략을 막아내고, 노동자의 힘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으로 독재를 무너뜨리고, 대중문화를 발전시켜 한류를 수출했습니다. 우리가 돌아보지 못한는 사이 우리 형제들은 일본에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요?" 이 책은 그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먼저 1959년부터 25년간 자이니치 60만명 가운데 10만 명이 북조선으로 이주한 '자이니치 대이동'의 전말을 다룬다. 한국은 왜 자니니치들을 받지 않았을까? 북조선은 왜 자이니치를 받은 것일까?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자이니치들의 고단한 처지를 생생한 증언으로 보여준다. 가족이 북조선을 선택한 고정미의 증언이다.

"조상 때부터 우리 가족은 물 위에 뜬 기름방울 같았다. 정착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북조선에서는 째포(재일동포)라고 불렀다. 서러웠다. 어디든 정착할 곳으로 가야 했다. 나는 일본으로 왔다. 하지만 이곳은 별다른 지원이 없다. 한국과 다르다. 한국에 증언하러 가보니,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정신과 치료도 받고 경제적 혜택도 있더라. 나는 일본에서 비자도 3년마다 연장하고 있다.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가고 싶다."

이어 일본 사회가 자이니치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린 재판 사건이 두 건이 소개된다.

1970년 자이니치 박종석의 히타치 제소사건, 2004년 자이니치 정향균의 도쿄도 제소사건이 그것이다. 히타치 사건은 본명과 본적 대신 통명과 고향을 적은 서류로 시험에 응시한 자이니치 아라이(본명 박종석)는 합격 통지를 받았으나 나중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요코하마지방재판소는 '해고가 부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일본의 많은 대기업이 재일 조선인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채용 거부해온 점을 생각하면, 히타치라는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본명과 본적을 적지 않은 이유에 동정할 부분이 많다"고 했다.

위자료를 줘야할 이유도 설명했다. "원고는 일본이름으로 일본인처럼 행동하면서 능력 있고 성실하다면 히타치에서 조인인임이 드러나도 해고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조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이 얼마나 깊은지 새롭게 알게 됐다.

재일 조선인이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 조선인답게 행동하며 조선 역사를 존중하고 조선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민족 차별에 따른 정신적 고통이 인정된다." 이후 박종석은 히타치 제작소에 근무하다 2011년 정년퇴직했다.


2009년 '자이니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 자이토쿠카이가 조선학교 앞에 나타나 근거 없는 소리로 학생들을 겁주고 공격했다. 조선학교는 자이토쿠카이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조선인 일반에 대한 차별적 증오 발언 처벌 조항이 없어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헤이트 스피치 사건의 민·형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자이토쿠카이는 활동을 계속했다. 이 사건의 민사소송에 대해 교토지방재판소는 자이토쿠가이에게 손해배상금과 조선학교 반경 200미터 거리 선전 금지를 선고했다.

2014년 오사카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하면서 "이들의 발언은 재일 조선인을 조롱하거나 일본 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이 일본인, 다른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부정하는 인종차별"이라고 추가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의 바닥에서 고통받아온 자이니치를 쓰기 위해 3년간 기획,제작했다.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현지에서 410일을 취재했다. 역사적인 성격을 고려해 녹음으로 남긴 인터뷰는 83시간 32분 46초,촬영한 사진은 6240장이다.

{RELNEWS:right}저자 이범준은 작가의 글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힌다. "취재를 위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유난히도 비가 오지 않습니다. 숨리 막히도록 뜨거운 오사카의 여름을 보내면서 자이니치들의 고단한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람을 배제하는 사회에서, 말라 죽지 않고 살아남은 그들의 삶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서울에서 보내는 이 기록이 그들의 아프고 외로웠던 지난날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제국 vs.자이니치:대결의 역사 1945~2015> 이범준 지음/ 북,콤마/384쪽/1만 8000원/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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