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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볼수록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나는 게 영화의 진짜 맛이라고 해도 ''추격자(나홍진 감독·비단길 제작)''는 정도가 좀 심하다.
연쇄살인을 둘러싼 1박 2일의 추격전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냉혹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고, 부조리한 사회상이 곁들여진 데다 심지어 신을 향한 의문까지 담겼다. 도무지 간단하지 않은 이 영화,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러니까 신인 감독의 첫 상업 영화란 뜻이다.
일찍이 제작보고회에서 "시나리오 쓰고 연출하는 동안 군대에 다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던 나홍진 감독을 만났다.
영화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의 정답에 동그라미를 치듯 해답을 명쾌하게 풀어놓은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외면하고 싶어도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를 둘러싸고 나눈 나 감독과의 대화는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흥미롭고 짜릿했다.
"지영민의 살해 동기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추격자''에는 두 명의 남자가 나온다. 비리로 해직된 전직 형사이자 현재는 출장 안마소 포주인 엄중호(김윤석)와 이유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쉼 없이 펼쳐지고 두 남자는 시종일관 땀범벅인데도 감독은 불친절하게 지영민이 왜 살인을 하는지, 엄중호는 왜 경찰의 역할까지 떠맡아 그 뒤를 쫓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범죄자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절대 살해 동기를 관객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취조실 장면에서 범죄학자가 지영민을 두고 ''성불구 아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장면에서도 동기를 확실히 설명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은 연쇄살인범 캐릭터를 고안하며 여러 전문서를 찾아 읽었다. 그러다 전문가들의 분석은 하나같이 모호한 결론에 그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BestNocut_L]"유년시절의 트라우마나 전두엽의 어느 부분이 비여서 살인을 저지른다, 선천적인 결여가 후천적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등의 분석이 대부분이었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라는 물음만 더 커졌다."
나 감독이 영화에서 지영민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 건 그 자신도 원인을 찾지 못했거나 혹은 섣부른 동기 부여가 오히려 영화가 담으려는 현실성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나 감독은 ''현재''만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지영민은 맛이 간 개다"는 센 화법으로 지영민을 설명한 그는 "그렇게 태어난 개니까 그대로 살아도 되느냐, 행동에 책임을 부여하지 않아도 되느냐를 끊임없이 되물었다"고 했다. "지영민은 인간이 덜 된 상태에서 세상에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도 말했다.
이렇게 표현된 지영민은 ''개미슈퍼 주인 여자''에게는 믿을만한 청년이고 석재상에서 일한 블루칼라인 "겉만 보면 굳이 꺼릴 이유가 없는 남자"다.
엄중호는 다르다. 나 감독은 "손대고 싶지 않은 일에 종사하는 엄중호는 지영민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캐릭터가 완성된다"면서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치를 떠는 중호와 지영민은 역설이 만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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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가 아닌 영화보다 더 잔인한 현실 드러내이유 없는 살인이 관객에게 묵직한 마음을 심어주는 것도 모자라 나 감독은 납치당한 여자 미진(서영희)의 7살짜리 딸을 등장시켜 그 마음의 짐을 몇 배로 늘린다. 인정사정 보지 않던 중호마저도 아이 앞에서는 눈빛이 흔들리고 만다.
하지만 아이의 등장은 잘 짜인 스릴러에 자칫 신파의 양념을 더해 맛을 변질시킬 수도 있었다.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두고 나 감독은 꽤 길게 아이의 상징을 설명했다.
"''추격자''는 미진이 처한 죽음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상대하고 싶지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몸을 파는 여자지만 관객 모두가 미진이 살기를 바란다. 그 딸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존재다. 딸은 미진의 유년과 가장 흡사할 테고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부모 없이 자라 미진처럼 몸을 팔게 됐다면 누가 아이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묻고 싶었다."
아이의 등장으로 나 감독은 단면으로 평가되는 사회 구조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미진이나 아이의 인생이 어긋난 게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비난의 화살은 누구에게 가야할 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했다.
영화 곳곳에 숨은 이런 설정은 나 감독의 입을 통해 하나씩 풀어지면서 ''추격자''가 단순히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가 아닌 영화보다 더 잔인한 현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용감한 나 감독은 자본의 힘에 좌우되는 상업영화를 처음 만들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현장을 지휘한 것으로 일찌감치 충무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제작자들이 아무리 현장에 찾아 설득해도 5년간 기획하고 쓴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집했다.
지영민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상을 만든 배경이나 밤거리를 촘촘히 밝히는 붉은 십자가를 여러 번 클로즈업하면서도 어김없이 그 아래서 살육이 벌어지는 과정을 담은 건 한편으로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한국의 밤은 십자가의 밤과도 같다. 누구나 십자가 아래에서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가 많지만 살인도 쉼 없이 일어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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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13일 만에 전국 관객 200만 돌파 ''흥행 탄력''1974년생인 나 감독은 30대에 접어들고 모든 시간을 ''추격자''에 쏟아부었다고 했다. 기획부터 시나리오까지 한 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영화에 드러나는 단서마다 또 다른 숨은 의미가 있는데도 줄기차게 "이게 현실이다"고만 말했던 나 감독은 실은 누구보다 치밀하게 쓰고 찍었다.
이는 곧 관객 동원에서 증명되고 있다.
지난 14일 개봉한 ''추격자''는 13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기록을 세우는 중이다. 첫 데뷔작으로 평단과 관객 호응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를 찍는 내내 "거짓말하지 말자, 정직하자"고 다짐했단다. 기교를 쓰는 대신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배우나 스태프들에게도 계속 ''자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추격자''의 이야기는 절대 넘치면 안 됐다. 어떤 부분에서도 현실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야 하는 게 숙제였다."
나홍진 감독은 촬영을 끝내고 김윤석에게 "3년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작품에서도 함께 하고픈 욕심이 발동한 까닭이다. 그 마음이 변함없느냐고 되묻자 나 감독은 "설마 3년이나 기다릴 수 있겠느냐"면서 "지금 추세라면 불가능한 일이다"고 스스로 마음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