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나와 보니 간혹 우리말 방송을 보고 싶을 때가 있어 아리랑TV를 틀어 몇번이고 본 적이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
한 미국인 친구와 한국드라마를 보는데 친구가 갑자기 ''''야, 너 한국사람인데 갑자기 왜 Chinese noodle을 먹어?''''하고 묻는다. 어디 중국국수라니? 나도 궁금해서 확인해 보니 자장면을 먹는 남녀의 모습 밑에 자막으로 ''''Chinese noodle''''이라는 말을 붙여놓은 것이다.
이 친구에게 ''''그게 말야, 약 백년 전에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한판 싸움이 붙었거든. 그때 한국에 남은 화교들이 만든 음식인데 거의 한국음식이라고 보면 돼'''' 이러니 ''''그런데 왜 중국 국수야? 한국 국수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음식이나 음식재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 적어도 그 음식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음식만의 특징을 잡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장면을 설명할 때는 그냥 ''''black noodle'''', 역시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당면(唐麵)은 ''''glass noodle''''로 번역한다. 투명한 당면의 면발이 유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만의 고유의 사물을 외국인이 알아듣게 하려면 복잡한 음식의 유래보다는 눈으로 봤을 때 보이는 특징을 잡아주는 것이 좋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자주 먹는 콩나물을 미국인들이 제대로 알아듣게 말하는 것이다.
보통 한국식품점에서는 콩나물을 이름 그대로 ''''bean sprout''''로 번역해 콩에서 싹을 틔운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러면 미국인들은 우리음식보다는 더 보편화된, 중국음식에 자주 쓰이는 숙주나물을 생각한다. 숙주는 녹두콩을 싹틔운 것이니 구별이 되지 않는다.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분리시키는 작업은 우리말과 비교적 비슷하고 음식재료도 유사한 일본어에서도 어려운 문제다. 메주콩을 싹틔워 먹는 나라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한국뿐이니 말이다.
영어에서도 이런 독특한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사람이 완벽한 영어를 하고 싶어도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놈이 있으니 문법에서는 관사이고 나머지 하나는 발음이다.
이미 발성구조가 굳은 상태에서 영어발음을 좋게 하려고 발음교정만 전문으로 하는 accent clinic을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교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You can''''t survive your accent''''
그러면 우리는 ''''내가 내 발음보다 오래 못산다고?''''로 번역하겠지만 결국 정확한 우리말로는 ''''죽을 때까지 모국어 발음은 없어지지 않아''''라는 절망적인 소식일 뿐이다. Survive는 ''''살아남다''''라는 뜻 외에 ''''~보다 오래 산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비교급인 than이 들어갈 말을 단순히 목적어로 처리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이 일상생활화된 게르만인들은 전투중에 죽는 일이 다반사였고 누구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상대를 죽인다는 의미도 됐다.
적을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약육강식 사회에서 결국 survive는 살아남는다는 의미보다는 누군가보다 더 오래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는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여성이 쓴 책을 읽어보니 결혼 전 신랑에게 예절교육을 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아빠 동생은 뭐라고 부르지?'''' ''''작은아버지'''' ''''그럼 우리아빠 형님은?'''' ''''큰아버지'''' 이런 식으로 배우다가 결국 신랑이 분통을 터뜨린다.
''''uncle이면 다 uncle이지 뭐 이리 복잡해?'''' 그러자, 이 분은 한마디로 신랑의 기를 꺾어놓는다. ''''잔소리말고 따라 해. 문화민족은 원래 다 그런거야.''''
얼마전 불고기를 해먹고 싶어 정육점에 들렀는데 불고기거리로 잘 쓰이는 약간 기름기가 있는 부위를 찾느라 온 슈퍼마켓을 다 뒤지고 다녔다. 스테이크위주로 요리를 하는 미국인들은 소를 도살한 뒤 고기분류를 우리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가만히 보니 소의 가슴살을 따로 떼어낸 ''''brisket''''이라는 부위가 내가 찾던 고기였다.
우리문화를 외국어로 소개할 때나 외국문화를 내 문화로 받아들일 때 알파벳에 의존해 더듬더듬 사전을 찾는 것보다는 사진 한번 제대로 찍어두거나 제대로 된 그림사전을 구입하는 것은 어떨까? 말 백마디보다 한번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 이서규 통신원은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 토박이로,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