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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에게 독살된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⑳ 창경궁 환경전

최근 방영된 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삼전도의 굴욕'.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 한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홈페이지에서 캡처)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능한 왕, 삼전도에서 조아리다

인조는 면복도 입지 못했다. 살을 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월(正月) 30일. 남한산성에 피해 있던 임금은 청나라의 군대의 위협적인 포격이 계속되자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임금은 융복만을 차려입은 초라한 행색으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앞에 섰다. 높은 단위에 올라앉은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임금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고, 청 태종은 신하들을 시켜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 자리한 삼전도비.

 

청 황제는 조선 임금의 불충을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 공덕을 기리는 비(碑)를 세우라 명했다. 높이가 4미터 가까이되는 상당히 큰 비석이었다.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이름의 이 비석은 ‘삼전도의 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후대에 자신의 자손이 왕위를 물려받아 정통성이 인정됐지만, 세조처럼 기존의 임금을 몰아낸 역모를 일으킨 것이다.

능양군 인조는 방패막이였던 인빈 김씨가 사망하자,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했다. 대북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미관말직에 밀려나 있던 서인세력들을 끌어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훈련대장 이흥립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정권의 정통성이 미약한 만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화할 수 밖에 없었던 인조는 중원에서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 즉 청(淸)나라를 오랑캐라며 비하했고, 결국 정묘,병자년에 걸쳐 두 차례나 청에게 침범을 당하는 외교적인 실책을 빚고 말았다.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서 광해군의 절묘한 외교술로 지켜온 불안한 평화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나라는 파탄나고, 임금은 전무후무한 모욕을 당하며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조선은 세자와 왕자를 비롯해 60만명이 넘는 인질을 청국에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세자를 청국에 인질로 보낸 이 사건은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잉태하고 말았다.

최근 방영된 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아버지 인조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홈페이지에서 캡쳐)

 

▲아들 소현세자,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음으로 내몬 임금

청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소현세자가 9년만에 돌아왔다. 멀고 먼 타향에서 그것도 전쟁에 진 대가로 굴욕적인 인질생활을 한 세자가 돌아왔으니 그보다 반가울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비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런 저런 환영행사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오갈 뿐이었고, 이후에도 인조의 쌀쌀맞은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했다.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됐지만, 소현세자는 불과 사흘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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