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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 여인의 회한(悔恨)이 서린 곳- 낙선재



문화 일반

    세 나라 여인의 회한(悔恨)이 서린 곳- 낙선재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⑯

    생후 8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황세손 이진의 묘, 숭의원. 조선왕실의 적통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있다. (사진=문영기 기자)

     

    ▲나시모토 마사코-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 황태자비로 숨진 여인

    숭인원(崇仁園)에는 가을이 흐드러졌다.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 인근에 있는 숭인원에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8개월짜리 갓난 아기가 묻혀있다. 이곳에 묻힌 아이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큰 아들 이진이다.

    일제는 순종의 황태자 이은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고종황제의 장례식날 촉발된 3.1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왕실의 자손이 더 이상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 가운데, 임신이 불가능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 왕족이면서 일본 왕세자비 후보로 결정됐다가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아 간택되지 못한 나시모토 마사코가 조선의 황태자비로 결정됐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영친왕은 물론 순종의 기쁨은 더 할 나위 없었다. 아들을 낳은 이듬해 영친왕과 이방자는 생후 8개월된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겸 동경에서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인 1922년 5월11일. 갑자기 건강하던 아기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아기의 입에서는 검은 물이 배어나왔다. 독살일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적통을 이어받은 손자를 잃은 순종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왕실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루고 명성황후(홍릉)의 곁에 묻혔다. 바로 숭인원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고국인 일본에서도 그리고 제2의 고국인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신산한 삶을 살았다.

     

    이방자는 이후 신산(辛酸)의 삶을 살았다. 일본과 한국 어느 한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비극적인 삶이었다.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그녀를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라고 칭했고, 영친왕을 금수(禽獸)로 표현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지위는 평민으로 강등됐고,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재산마저 빼앗긴 그녀는 생계를 걱정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조선왕족의 귀국을 극도로 경계한 이승만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머물던 이방자는 63년 박정희의 배려로 돌아와 낙선재에 머물렀다.

    황실재산 환원문제가 난관에 빠지고, 경영권 분쟁이 심했던 숙명재단에서도 배척당한 그녀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칠보를 팔거나 바자등을 열어 자금을 마련한 뒤, 장애인 복지에 힘을 쏟았다.

    둘째아들 이구가 사업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떠난 뒤, 아들의 귀국을 설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본인 동거녀와 마음이 맞지 않아 일본의 친척집을 전전하다 1년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2년 뒤 덕혜옹주가 숨진 지 꼭 열흘만에 낙선재에서 영면했다. 한국말에 서툴렀지만, 자신은 한국 국민이라고 늘 답했다. 그녀는 영친왕과 함께 홍릉에 묻혀 있다.

    ▲덕혜옹주 - 황제가 환갑에 얻은 귀한 딸

    고종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 비운의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

     

    고종의 환갑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메이지천황의 황후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 해에 고종은 귀인 양씨에게 딸을 얻었다.

    명성황후로부터 얻은 자식들을 모두 일찍 보낸 고종으로서는 늦은 나이에 얻은 덕혜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식이었다.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고 매일 딸의 재롱을 보러 찾아왔다.

    하지만 덕혜옹주의 행복한 삶은 거기까지였다. 8살에 아버지 고종이 세상을 뜨고 덕수궁을 나온 덕혜는 열 네살에 생모와도 헤어져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 유학이 명분이었지만, 인질임이 분명했다. 일본 귀족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열다섯때 오빠인 순종황제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허가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순종황제는 곧 숨지고 말았지만, 덕혜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고종의 장례식이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3.1만세운동을 불러왔듯이,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일제의 이같은 처사에도 순종의 장레식은 6.10만세 운동을 불러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끌려가듯 돌아갔고, 일본의 하층귀족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했다. 결혼을 전후로 그녀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창덕궁 수강재. 궁궐에 있지만 여느 양반집처럼 단청도 없이 소박하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뒤 숨질때까지 머물던 곳이다.(자료제공=문화재청)

     

    결혼이 행복할 리 만무했다. 정신분열로까지 이어진 그녀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의 패망으로 귀족들의 재산이 모두 미 군정에게 몰수당하면서 생활고에 몰린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뒤, 일방적으로 이혼절차를 밟아버렸다.

    그리고 이혼 1년뒤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 정혜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1962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이미 정신과 육체가 망가져 있었다.

    이방자여사와 함께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낸 그녀는 1989년 낙선재 수강재에서 주로 머물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와 결혼한 미국인 줄리아 멀룩.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종친들로부터 배척받다, 결국 이구와 강제 이혼당했다.

     

    ▲줄리아 멀룩-남편의 장례식도 참석 못한 푸른 눈의 여인

    2005년 7월 24일. 이방자의 유일한 혈육 이구씨의 장례식이 서울에서 열렸다. 그런데 운구가 지나가는 종묘앞 길 건너편에 휠체어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벽안의 노인이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장례식을 훔쳐보던 그녀는 방송 카메라가 다가서자 완강히 취재를 거부하며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이구의 부인 줄리아 멀룩이었다.

    이방자의 둘째 아들 이구는 형인 이진이 생후 8개월만에 사망한지 10년만에 얻은 아들이다. 조선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인물인 이구 역시 일본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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