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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휘둘린 3일천하-창덕궁 관물헌



문화 일반

    외세에 휘둘린 3일천하-창덕궁 관물헌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⑬

    '3일 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의 마지막 무대가 된 창덕궁 관물헌의 가을 정경(자료제공=문화재청)

     

    갑신정변의 마지막 무대 관물헌(觀物軒)

    1884년 10월 19일.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에 수상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물샐 틈조차 없이 궁궐을 둘러싼 군사들은 다름 아닌 청나라 군사들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창덕궁을 둘러싼 군사는 무려 천5백을 넘게 헤아렸다. 이들은 순식간에 돈화문과 선인문을 거쳐 궁 안으로 난입했다. 천여명의 조선군들이 방어에 나섰지만, 1차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2차방어선을 구축했던 일본군은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은 채 도망치기 바빴고, 남은 것은 개화당의 50명의 병사와 몇 안되는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뿐이었다.

    관물헌에서 고종을 사실상 감금하고 있던 김옥균과 서광범, 박영효, 그리고 홍영식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

    개화파 김옥균의 모습.

     

    김옥균등 몇몇은 겨우 몸을 빼냈지만, 홍영식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급진개혁파들이 시도했던 자주적인 근대국가 건립의 희망은 어이없게도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의 주체들과 일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6가지로 꼽았다.

    첫째, 군주를 위협한 점. 둘째,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셋째,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넷째,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다섯째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여섯째,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다급하게 처리한 점.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 서재필(?)

    갑신정변 주역중 한사람인 서재필. 미국에 정착해 미국인 신분으로 살았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정변이후 가장 독특한 인생행보를 걸어간 사람은 독립신문으로 유명한 서재필이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신문을 창간하는등 다소 이지적이고 정적인 인물로 보기 쉽지만, 사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고위대신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은 행동대장이었다.

    서재필은 19살이었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관으로 변신해 일본의 육군학교를 나온 전형적인 강골이자 무관이다.

    서재필은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하고, 미국내에서도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의사가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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