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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를 사냥하라! 국모시해의 현장, 건청궁



문화 일반

    여우를 사냥하라! 국모시해의 현장, 건청궁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⑦

    조선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황제 고종의 어진 (자료제공=국립중앙박물관)

     

    ▲대원군에게 벗어나고 싶은 고종, 건청궁을 짓다

    고종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 경복궁 뒤편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고, 문호를 개방하라는 서구 열강들의 압력은 거세지고 있건만, 쇄국의 고집은 여전히 꺽지 않고 있었다.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중전 민씨와 거처할 공간을 따로 만들고 싶었다. 일국의 왕이 건물 한 채 지으면서 자신의 사비로 그것도 몰래 짓기 시작한 건물이 건청궁이다.

    경복궁의 전각 가운데 유일하게 궁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건청궁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안채와 사랑채, 행랑등이 있는 여느 사대부의 집과 다름없다.

    그리고 건청궁 앞 뜰에는 연못을 파고 향원지라 이름 지었다. 경복궁의 전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전각인 향원정을 세웠고, 건청궁에서 다니기 쉽게 아예 다리로 연결했다.

    고종이 건청궁을 건립하면서 같이 만든 향원지와 향원정.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지만, 명성왕후의 시신이 뿌려지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향원정은 고종의 사적인 휴식공간이기도 하지만, 건청궁을 경복궁으로부터 독립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고종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있는 곳이기도하다.

    따라서 고종의 건청궁 건립은 대원군의 섭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쇄국정책의 종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종이 최초로 향원정과 건청궁에 전기를 끌어들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조선이 근대문물을 받아들였다는것을 대내외에 공표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였다.

    ▲열강의 먹이감이 된 조선

    조선의 대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발톱을 숨긴 서구 열강들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RELNEWS:left}특히 일본의 공세는 집요했다. 일본은 조선의 농산물을 싹쓸이하다시피 가져갔다. 가뜩이나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던 조선말, 일본의 이같은 행위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 농민들의 허리춤을 더 옥죄는 일이었다.

    참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힘없는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일본은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를 차지한 일본에 대해 서구 열강들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요동을 빼앗긴 일본은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를 간파한 고종과 민비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고, 세력 만회를 위해 일본은 결국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잔인한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경복궁 건청궁 전경. 고종이 대원군의 섭정을 막기위해 건립했지만, 일본인들에게 국모가 시해되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됐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여우를 사냥하라!’ 민비 시해사건

    1895년 10월 8일. 동이 트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칼을 찬 수상한 무리들이 경복궁의 담을 타고 넘고 있었다.

    이미 만취한 이 무리들은 광화문에서 총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울리는 총성. 이들을 쏜살같이 건청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고종을 감금한 무리들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명성왕후를 찾기 시작했다. 궁궐이 소란스럽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건청궁으로 뛰어들었다.

    왕후 앞을 막아선 이경직은 그러나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후의 얼굴을 모르는 이 살인귀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기 시작했다.

    결국 궁녀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던 명성왕후는 낭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본 낭인들은 명성왕후의 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안치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으로 옮겨 불태웠다.

    명성왕후는 결국 자신과 고종이 늘 산책하던 향원정에 재로 뿌려지고 말았다.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된, 국모 시해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일설에는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다.

    박영효는 사건을 주도한 미우라에게 ‘민비는 한국의 큰 여우로 만사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고종은 결국 ‘아관파천’으로 건청궁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죄과를 덮으려는 듯 일제는 건청궁의 모든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광복후에 건청궁 자리는 민속박물관이 들어섰다가, 2007년 복원됐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역사가 건청궁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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