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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멈추면 잘린다"…작업중지권 확대에도 건설현장은 '막막' ②'찍힐까' 못 멈춘다…재해율 15% 낮춘 '스마트 멈춤'의 비결 (계속) |
"공기 단축이 압박으로 다가와 작업중지가 눈치 보인다."(설문조사 중)
건설현장에서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인 '작업중지권'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제도를 몰라서만은 아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구조적 족쇄가 노동자들의 발목을 강하게 잡고 있다.
29일 CBS노컷뉴스가 건설노동자 3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건설현장 작업중지권 설문조사'에 따르면, 건설노동자들은 생존권의 위협과 원청의 공기 단축 압박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 익명성이 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도입한 대기업 현장이나, 이미 법적으로 강력한 권리를 보장한 해외 선진국의 사례는 중소규모 건설현장의 척박한 현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내일 잘릴까 봐"…숫자로 드러난 '블랙리스트' 공포
조사 결과, 노동자들이 멈춤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고용 불안'이었다.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받거나 다음 현장 취업에서 블랙리스트로 찍힐까 봐 두려워 참고 일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59.5%가 "그렇다"고 답했다.
주관식 응답에는 "내일부터 일하러 나오지 못하게 할까 봐", "공정에 클레임을 걸면 찍히기 때문"이라는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용직 중심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안전을 요구하는 행위는 곧 '밥줄을 끊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낸 용기조차 현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판단해 작업중지를 요구했으나 관리자가 이 정도는 괜찮다며 묵살하거나 강행시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44.1%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모바일 앱이나 익명 톡방 등 눈치 보지 않고 쉽게 작업중지를 요청할 창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67.8%가 "없다"고 응답해, 관리자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구조 자체가 노동자들의 입을 닫게 만들고 있음이 확인됐다.
재해율 15% 감소… 대기업의 '스마트 멈춤'이 보여준 효과
만약 작업중지권을 온전히 보장하면 기업의 우려처럼 공사 일정에 치명적인 차질이 생길까. 선도적인 국내 대형 건설사들의 실증적 데이터는 "안전 투자가 곧 이익"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삼성물산은 2021년 3월 근로자에게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한 이후, 2024년 3월까지 국내외 113개 현장에서 총 30만1355건의 작업중지권 행사를 기록했다.
성과의 핵심은 '인센티브'였다. 회사는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근로자에게 포상을 제공하며 참여를 독려했고, 그 결과 현장 재해 발생률이 매년 15%씩 감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2년 고용노동부 우수 사례로 선정된 삼성엔지니어링 역시 제보 근로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 95건의 위험 요인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형 사고를 예방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IT 기술의 결합이다. 안전보건공단 사례집에 따르면 다수의 선도 건설기업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모바일 익명 신고 시스템'을 도입했다.
노동자가 앱으로 사진과 위치를 첨부해 익명으로 위험을 신고하면, 관리자가 즉각 위험 등급을 판단하고 조치하는 방식이다. 관리자 눈치를 봐야 하는 대면 항의의 부담을 기술로 극복한 사례다.
"법이 곧 방패"…안전 선진국의 구조적 해법
대기업의 '자율'에 기댄 한국과 달리, 해외 안전 선진국들은 강력한 법적 권한과 보호 장치를 통해 작업중지권을 실질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캐나다다. 캐나다는 작업 재개 과정에서 노사 동수로 구성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나 안전대표를 통해 노동조합이 개입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또 작업 거부권이 유지되는 기간에는 노무 제공 없이도 사용자의 임금 지급 의무를 법에 명시해, 멈춤으로 인한 경제적 불이익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노조나 노동자가 선출한 '안전대표'에게 작업장 조사와 즉각적인 작업중지 권한을 부여하고 있으며, 영국 역시 사업주에게 위험 대응 관리자를 지정하도록 하고 노조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노동자 개인이 홀로 위험과 불이익을 감당하지 않도록, 노동조합이나 안전대표 등 '집단적 대리인'의 개입을 법으로 보장했다는 점이다.
현재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도 "근로자, 근로자대표,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거나 우려되는 경우 사업주에게 안전·보건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겼다. 다만 노동계는 단순한 '요청권' 수준을 넘어, 사업주에게 이행 의무를 명확히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합뉴스"신고하면 보상"…현장 공포 줄일 장치 될까
현장의 공포를 제도적으로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고 포상금 제도'도 논의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안전관리 신고 포상금 횟수 제한을 왜 하느냐"며 제도의 적극적인 운영을 주문한 바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사업주의 산재 은폐나 법 위반 사실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관련 예산만 111억 원이 책정됐다.
정부의 노동안전종합대책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기준 위반 신고 시 건당 50만 원, 산재 은폐 등 고의적 법 위반 신고 시 건당 500만 원의 파격적인 포상금이 지급된다. 이를 위한 온라인·모바일 기반 '안전일터 신고센터'도 개설될 예정이다.
문제는 제도를 뒷받침할 법적 기반이다. 관련 법률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예산은 확보됐지만 근거법이 없어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산안법 개정안에는 작업중지권 요건 확대 등 핵심 내용도 함께 포함돼 있다.
정부의 의지와 예산이 마련됐음에도 이를 현장에 적용할 최소한의 입법조차 지연되고 있는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산업재해노동자의 날'인 전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방치된 위험과 작은 빈틈으로 인해 '사람만 뒤바뀐 익숙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빈틈 없이 정비하겠다. 필요하면 새로운 기준과 제도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의 호소는 여전히 국회 문턱 앞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