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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 95처럼 버퍼링이"…일할수록 밀려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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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윈도 95처럼 버퍼링이"…일할수록 밀려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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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들'①]

    건물 지도 수차례 외웠지만…"왜 이렇게 늦어요?"
    "사회성 부족, 못 뽑아"…자격증 3개도 뚫지 못한 면접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선'…'700만 명' 추산
    먼저 말 못 한 母 "수지타산 맞아야 고용하지…혜택 없으니"

    병준씨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 김정록 기자병준씨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 김정록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윈도 95처럼 버퍼링이"…일할수록 밀려난 청년
    (계속)


    "한 달 안에 업무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회사에서도 조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김병준(30·가명)씨가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건물에 출근한 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2025년 1월 영하를 밑도는 겨울, 병준씨는 지하 4층, 지상 8·10층짜리 건물 앞에 섰다. 건물 입구에 있는 거꾸로 박힌 코끼리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흰색 드레스셔츠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병준씨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이 건물 경비 일을 맡게 된 터였다. '이번에는 잘 해보자.'

    업무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는 아침조와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근무하는 저녁조로 나뉘었다. 건물 입구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등록하고 안내하는 일, 정해진 시간에 건물을 순찰하는 일, VIP 방문 시 대응하는 일이 병준씨의 업무였다.


    건물 경비 취업…순찰 동선 외워도 '가도 또 간 곳 같아'


    "왜 이래요? 왜 이렇게 늦어요?" 동료들이 쏘아붙일 때마다 병준씨는 진땀이 났다. 공사 인부들이 몰려들면 그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출입 등록까지 하는 일이 한 번에 되지 않았다.

    15명 안팎의 VIP 리스트를 외우는 일도 어려웠다. 리스트는 텔레그램으로 공유되는데, 실시간으로 수정되기도 하고 외국인도 포함돼 있었다. VIP가 방문하면 먼저 알아보고 나가 맞이해야 하는데, 병준씨는 이들을 숙지하는 데 애를 먹었다.

    지하까지 포함해 10여 개 층의 건물 전체를 순찰하는 일은 가장 벅찼다. 코스별로 순찰 동선이 그려진 프린트물에 따라 한 층마다 지정된 3~4곳에 보안카드를 찍는 일이었다. 순찰 담당자는 1시간 안에 자기 구역을 돌아야 했다. 숙련된 동료들은 40~50분이면 끝냈다.

    특히 밤 순찰이 더 어려웠다. 모든 사무실 불이 꺼진 복도는 조용했다. 병준씨는 프린트물을 들여다봤다. 분명히 이 층이 맞는데, 카드를 찍어야 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 걸어간 길을 다시 걷기도 했다. 같은 복도가 다른 복도처럼 느껴졌다.

    "저도 너무 답답했어요." 병준씨가 말했다. "외우려고 시뮬레이션까지 해봤는데, 정보들이 머릿속에 너무 늦게 입력되는 거예요.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1시간이 지났지만 순찰을 끝내지 못했다.


    병원 보호사·아파트 경비 전전…3개월 못 넘겨


    병준씨는 이전에도 병원 보호사, 아파트 경비 등을 전전했지만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빨리빨리, 왜 노력을 안 하냐." 병준씨는 일을 하며 동료들에게 늘 이런 말을 들었다.

    "일을 하면 새로운 상황이 계속 입력되는데, 저는 옛날 '윈도 95' 컴퓨터처럼 버퍼링이 심하게 걸리는 거예요." 병준씨가 말했다. 반면 2018년 친척이 운영하는 소스 공장에서 정해진 보조 업무만 할 때는 큰 무리가 없었다.


    병준씨가 자격증 시험을 공부한 책. 김정록 기자병준씨가 자격증 시험을 공부한 책. 김정록 기자
    노력이 부족했을까. 병준씨는 지게차, 간호조무사, 컴퓨터활용능력 2급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제과제빵 자격증도 공부했지만 손을 많이 써야 하는 탓에 취득하지는 못했다.

    자격증 공부를 할 때는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학원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밤 11시까지 추가로 공부했다. 학원에서는 "너 이렇게 게으르게 할래? 공부 좀 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격증을 따냈다.

    이렇게 취득한 자격증들도 병준씨를 지켜주지 못했다. "사회성이 너무 부족해서 당신은 뽑을 수 없어요. 왜 우리가 당신을 써야 합니까." 면접에서 병준씨는 이런 말을 들었다.


    "재미 삼아 때렸어요" 학창 시절 폭력도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도 순탄하지 않았다. 수업을 따라가야 했지만 내용이 머릿속에 빠르게 들어오지 않았다. 또래들보다 뒤처지기 시작했다.

    "수업 내용이 인지가 안 됐어요. 머릿속에 인지가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를 못했어요." 병준씨가 말했다. "나는 정상인인데 왜 이렇게 느리지. 자꾸 제 자신을 탓했죠."

    친구들은 '만만한' 병준씨를 가만두지 않았다. 중학생 때는 돈을 빼앗기기 일쑤였고, 10여 명에게 둘러싸여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오른쪽 팔과 어깨는 붉게 멍들지 않은 날을 찾기 어려웠다. 학생들은 학생부 선생님에게 "재미 삼아 때렸어요. 우리보다 느리니까요"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는 일진 무리가 얼굴을 때려 오른쪽 입술 위쪽이 찢어져 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 무리에는 복싱과 합기도를 배운 학생도 있었다.

    "그때 애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해서,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해져야 한다고요." 병준씨는 성인이 된 뒤 태권도와 주짓수, 종합격투기, 심지어 필리핀 전통 무술인 에스크리마까지 배웠다.


    "복지는 없어요…차라리 장애 판정을 받아볼까요?"


    2024년 12월, 병준씨는 어머니 박선영(69·가명)씨와 경기 부천의 한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임상심리사는 병준씨가 한 달 전 받았던 심리검사지를 들고 상담실로 들어왔다. 병준씨와 선영씨는 임상심리사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한국판 성인용 웩슬러 지능검사 실시 결과, 전체 지능은 67로 '경도 지적장애' 수준에 해당합니다. 비교적 안정적인 소검사 수행과 신뢰구간을 고려했을 때 지적 잠재력은 '경계선 범위'로 추정됩니다."


    병준씨의 웩슬러 지능검사 결과 보고서. AI 생성 이미지병준씨의 웩슬러 지능검사 결과 보고서. AI 생성 이미지
    임상심리사는 병준씨를 '경계선 지능인'(느린학습자)으로 판정했다. 일반적으로 지능지수(IQ) 71~84를 경계선 지능으로 분류한다. 병준씨의 전체 지능은 67로 수치만 보면 '경도 지적장애' 범위였지만, 임상심리사는 검사 수행의 안정성과 신뢰구간을 고려해 지적 잠재력을 '경계선 범위'로 판단한 것이다.

    "경계선 지능인들은 복지가 아예 없어요. 장애인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게 해드릴까요?" 임상심리사가 말했다. "장애 등록을 시도해보겠지만…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병준씨는 이때까지도 경계선 지능인이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장애인은 아니라고 하니, 그냥 일반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병준씨의 검사지 한 항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리석게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외로움, 외롭게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


    "마음이 울쌍했다"…퇴사 뒤 옥상서 '몸 던질까'


    마곡동 건물 경비로 출근한 것도 상담센터에서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결과를 들은 뒤였다. 꼭 해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2주가 지나도록 순찰 코스를 외우지 못했고 VIP 리스트는 여전히 낯설었다.

    팀장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본 날, 근무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ChatGPT에 '경계선 지능인'을 검색했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사회성과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내용을 봤어요. 그걸 읽다 보니 마음이 울쌍했어요." 병준씨는 2주 만에 퇴사를 결정했다. "저 때문에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경계선 지능인이 무엇인지 알게 된 직후, 병준씨는 늘 운동하던 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몸을 던질까. 경동맥을 마체테 같은 걸로 그어버리면 편해지겠지.' 강해지려고 배웠던 무술 덕분에 경동맥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현재 한국에서 경계선 지능인의 분포를 확인할 수 있는 공식 통계는 없다. 미국의 지적장애 및 발달장애 학회(AAIDD)가 제시한 추정 방식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13.59%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를 한국 인구에 적용하면 약 7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취업의 어려움은 병준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보건복지인재원이 2022년 경계선지능 청년 2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취업률은 53.3%로 일반 청년(65.2%)보다 낮았다. 미취업자 4명 중 1명은 '취업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구직 자체를 포기했다.

    일자리를 얻은 이들 역시 63.1%가 비정규직이었고, 직장에서는 '업무 성과 미흡'(22.2%), '대인관계 어려움'(18.5%)을 겪고 있었다.


    한국보건복지인재원 보고서. AI 생성 이미지 재구성 한국보건복지인재원 보고서. AI 생성 이미지 재구성 

    母 "아들이 포기할까 봐…먼저 말 못 했어요"


    선영씨는 병준씨가 어릴 때부터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이 지난 뒤 말을 하기 시작했던 병준씨가 갑자기 말을 멈췄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병원 검사를 예약했지만 병준씨 아버지는 "애가 느릴 뿐이지 그런 게 아니다"라며 취소했다.

    "병준이가 마음에 상처를 받아 스스로를 포기할까 봐, '나는 이렇게 못하는 게 당연해'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먼저 말을 못했어요." 선영씨가 말했다.

    선영씨는 병준씨가 그저 천천히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사회에 나설수록 더 많은 벽에 부딪히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같은 돈이면 빨리 일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을 쓰는 게 맞죠. 수지타산이 맞아야 고용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선영씨가 말했다. "무슨 혜택이라도 있으면 그걸 보고서라도 안고 가겠지만, 그런 건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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