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단종의 죽음. 그 서사를 집요하게 파고든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장편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가 현대어로 다듬어진 판본으로 새롭게 출간됐다.
'단종애사'(새움)는 1928~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원작을 바탕으로, 작품의 원형과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문장을 현대 독자의 언어 감각에 맞게 다듬은 개정판이다. 고어체와 당대 문어체의 장벽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던 근대문학 텍스트를 오늘의 독자가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소설은 세종의 손자이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뒤 비극적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궁중의 법도와 권력의 술책, 피비린내 나는 정쟁, 충신과 간신의 갈림길이 촘촘히 얽힌다.
권력을 향한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된 한명회, 절개의 상징으로 남은 성삼문과 박팽년, 그리고 김종서·정인지 등 실존 인물들이 서사의 중심에서 날것의 얼굴로 되살아난다. 수양대군이 "활시위를 떠난 살이 다시 돌아오는 법은 없다"고 외치며 거사를 강행하는 장면,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요구에 분노와 눈물을 터뜨리는 단종의 모습 등은 오늘날 사극과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장면의 원형으로 읽힌다.
새움 제공 "이 책을 읽지 않고 '조선'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남긴 저자 이광수의 말은, 단종의 운명을 통해 조선인의 마음과 권력의 본질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단종 복위 운동과 사육신·생육신의 절의는 이후 중종반정, 인조반정 등 조선 정치사의 주요 변곡점에까지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단종애사'는 단순한 역사소설을 넘어, 한국 사극과 영화의 서사적 DNA로 기능해온 작품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등 여러 작품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만큼, 대중문화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사후 100년이 지나 복위된 단종처럼, 500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호명된 그의 삶과 죽음은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 '권력은 무엇으로 완성되고, 인간의 의리와 절개는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가'라며 묻는 것만 같다.
이광수 지음 | 이정서 편저 | 새움 | 5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