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1일부터 본격 시행되면서 EU로 수출되는 국내 제품에 대한 탄소 비용 부과가 현실화 됐다. 실제 CBAM 인증서 구매 시점은 1년가량 미뤄졌지만, 제품별 탄소 배출량에 따라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는 이미 확정된 만큼 중장기적 부담은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탄소 집약도가 높은 철강업계를 시작으로, 향후 가전·자동차 부품 등 제조업 전반으로 부담이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EU CBAM 본격 시행…탄소세 비용 수출 원가에 전가 구조 "사실상 무역장벽"
1일 업계에 따르면 EU의 CBAM에 따른 탄소세 부과가 이날부터 본격 시행됐다. CBAM은 EU로 수출되는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7개 품목에 대해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EU가 역내 산업에 적용하고 있는 강력한 탄소 배출 규제와 동일한 수준의 비용을 수입품에도 부과해, 비(非)EU 국가와의 공정한 경쟁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CBAM 부담은 수입 물량에 제품별 탄소 배출량을 곱한 뒤, 여기에 EU 배출권거래제(ETS)에서 형성된 탄소 가격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산정된다. 제품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할수록 인증서 구매 비용도 늘어나는 구조다.
인증서 구매 비용은 국내 수출기업이 아닌 유럽 수입업체가 부담하도록 돼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수입업체가 납품단가 인하나 비용 분담을 요구하며 부담을 수출업체에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 경우 CBAM은 관세와 유사한 비용 부담으로 작용해 우리 기업의 대EU 수출 원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탄소 비용이 부과되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CBAM이 사실상 새로운 무역장벽이라는 반발도 나온다. EU는 CBAM 도입으로 연간 14억유로(약 2조 4300억원)의 재정 수입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CBAM이 시행됐다고 해서 가격 부담이 당장 현실화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날부터 탄소세 부과 의무가 발생하지만, 2026년 물량에 대한 CBAM 인증서 구매 시점이 2027년 2월로 순연되면서 업계의 현금 부담은 당분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중장기 부담이 급격히 커진다는 점이다. CBAM은 탄소 비용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구조로 설계돼, 2026년에는 전체 부담의 2.5% 수준에 그치지만, 2030년에는 48.5%, 2034년에는 100%까지 적용 비율이 높아진다.
초기에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2030년대 들어 우리 기업의 비용 부담이 빠르게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안 그래도 힘든 철강에 CBAM까지 'N중고'…자동차 부품·가전으로 확대 예고
연합뉴스CBAM 시행에 따른 영향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은 철강업계다. 대한상공회의소 분석에 따르면 CBAM 도입으로
국내 철강 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2026년 851억원에서 2034년에는 5500억원까지 늘어나며, 향후 10년간 누적 부담 규모가 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철강은 철광석을 석탄 연료로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공정 특성상 탄소 배출량이 많은 대표적인 '난(難)감축 산업'으로 분류된다. 전기로 전환이나 수소환원제철 등 저탄소 공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대규모 투자와 기술 성숙도가 요구돼 단기간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업계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 등으로 실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CBAM까지 본격 가동되며, 업계에 악재가 겹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CBAM 부담은 철강에 그치지 않고 자동차 부품과 가전 등 하류 산업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EU는 현재 CBAM 적용 대상을 기존 원재료 중심에서 하류재(가공제품)까지 넓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2028년 1월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적용 대상이 하류재로 확대될 경우, 철강을 중간재로 사용하는 가전·자동차 부품 등 국내 제조업 전반으로 CBAM 부담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문가들 "CBAM 대응, K-ETS 연계·저탄소 경쟁력이 관건"
업계와 전문가들은 CBAM에 따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유럽 현지 생산 확대, 한국형 탄소배출권 거래제(ETS)와의 연계, 저탄소 기술 경쟁력 강화 등을 병행하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다만 단기적인 비용 회피보다는 중장기적인 구조 전환이 핵심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CBAM 규정상 EU는 수입 제품이 이미 다른 국가에서 탄소 가격을 지불한 경우, 그만큼을 인증서 구매 비용에서 차감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한국형 ETS를 CBAM과 최대한 연동해 '이중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배출권 가격과 제도를 EU가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단순히 배출권 가격만 놓고 보면 한국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탄소 시장은 국가별 제도·배출 구조 등 다양한 요인을 함께 봐야 한다"며
"가격 비교가 아닌 탄소 시장 전반을 감안한 산정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EU 측과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소영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수석연구원도 "CBAM과 한국 ETS를 실질적으로 연계해 참작해 달라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저탄소 기술과 배출량 관리에서 앞서 나가 국제 표준을 선점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CBAM 부담을 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럽 현지 생산 공장 확충도 거론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모든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해법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이미 유럽에 생산 거점이 있거나 투자 계획이 있던 기업이라면 가능하겠지만, CBAM 대응만을 이유로 대규모 해외 투자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해외 직접 투자는 시장 규모, 생산 여력, 경쟁력 등 복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탄소 비용을 정확히 산정·관리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박 연구위원은
"탄소 배출량 관리와 비용 산정을 위해서는 기업별·공정별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며 "수많은 협력사가 얽힌 산업 구조를 고려하면, 기업 개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국가 차원의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