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북한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23년 9월 13일 러시아 극동지역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 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설명을 하는 모습. 주 북한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캡처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이후 북한과 러시아가 급속도로 밀착하고 있다. 최근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마체고라의 발언은 북·러 관계가 더 진전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마체고라 대사는 지난 20일 러시아 이즈베스티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러시아가 올해도 여러 번 고위급 교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추가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련 시대를 포함해 러시아의 역대 최고지도자 가운데 평양을 방문한 사례는 푸틴이 유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옐친 그 누구도 북한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푸틴은 김정일과 김정은 시기에 각각 한 번씩 2번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은과는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며 3번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김정은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병력과 무기를 대줬다. 이에 호응해 푸틴은 지난해 6월 평양을 두 번째로 방문했다. 그리고 북한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을 체결했다. 상호 군사협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된 것이다.
지난 9일 김정은은 평양시 서문동에 있는 주 북한 러시아 대사관을 찾아갔다. 러시아의 2차 대전 승전 8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마체고라 대사는 평양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은 러시아 영토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 기념행사에 직접 참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9일 평양에 있는 주 북한 러시아 대사관을 방문해 현관에서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대사의 영접을 받고 있다. 김정은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의 2차 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대사관을 찾아 축하를 표시했다. 주 북한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 캡처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은 거의 6년째 만나지 않고 있다. 시진핑과 김정은이 마지막으로 만난 시점은 2019년 6월이다. 당시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이른바 '하노이 노딜'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미국과의 국교정상화에 대한 기대도 사실상 접었던 시기다.
바로 이런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찾아간 것이다. 국가주석에 취임 이래 첫 북한 방문이다. 김정은은 시진핑 주석을 환대했다. 평양의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린 집단체조 공연에서는 시 주석의 선친인 시중쉰의 모습을 넣은 동영상도 등장했다.
그리고 김정은은 체제안전 보장과 경제 회생을 도와달라고 시진핑에게 요청했다. 트럼프를 믿지 못하겠으니 시진핑이 북한 편에 굳건히 서 달라는 뜻이다. 시진핑은 김정은에게 "힘껏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북한 체제의 안전 보장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진핑도 미국을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이 스스로 찬성했던 안보리의 대북제재에서 발을 빼기도 힘들다. 더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중국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019년 6월 20~21일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약 6년 동안 북·중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19년 6월 20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북·중 우의를 주제로 한 집단체조 모습. 김정은·시진핑 부부가 함께 관람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북한에 대거 보내자는 방안이 떠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때마침 김정은은 북한내 관광지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관광객이 북한에서 쓰는 돈은 UN 안보리 제재로도 막기가 어렵다. 나름 묘안이었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노병과 후손들을 조직해 북한에 보내면 일석삼조가 된다. 관광객이 가면 현금 지원이나 똑같다는 생색을 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항미원조'의 역사를 되살려 북·중 우의도 과시하고, '반미 애국주의 선전'에도 활용할 수 있다. 아예 판문점 경로를 이용한 중국인 관광객들의 남북한 관통 여행을 추진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시진핑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폐렴 환자가 급증하면서 코로나19 펜데믹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국경을 걸어 잠갔고 북·중 간 인적, 물적 교류는 단절됐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과 경제회생 지원을 힘껏 돕겠다는 시진핑의 약속도 공수표가 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마친 뒤 북한군 대표단과 악수를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사진은 관련 내용을 전한 북한 조선중앙통신 기사. 주 북한 러시아대사관 홈페이지 캡처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인 2022년 2월 세계를 뒤흔드는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로 침공한 것이다. 김정은은 갑자기 찾아온 전쟁에서 기회를 붙잡았다. 그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 러시아는 중국과 비교할 때 북한을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및 보유에도 중국보다 덜 민감하게 대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모스크바는 북한에서 직선거리로 6천 km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도 독창적인 해법을 거의 내놓지 못했다. 중국의 이른바 '쌍궤병진' 방안을 지지하며 보조를 맞추는 정도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북한 내부의 정치, 경제적 변화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중국이 북한과 접한 국경의 길이는 무려 1,300여 km다. 중국은 핵무기를 포함한 북한의 군사력 동향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13일 "북한은 이미 자체 핵우산을 가지고 있다"고 발언했다.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라면 하기 어려운 말이다. 사진은 지난 2023년 7월 12일 북한이 신형 고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화성-18형을 시험 발사하는 모습. 연합뉴스단지 핵무기 문제뿐 만이 아니다. 지난 2002년 중국 당국은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임명한 양빈(楊斌) 신의주 특구 장관을 갑자기 구속했다. 이후 김정일이 중국을 모델로 해 야심차게 추진했던 첫 대외개방 사업인 신의주특구 개발은 좌절됐다.
당시 김정일이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양빈을 발탁한 것은 중국과의 협력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극약 처방으로 싹을 잘랐다. 국경 지역인 신의주 개발이 자국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김정은이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맺은 배경에는 중국에 대한 견제 심리도 깔려있을 것이다. 북한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특수부대를 포함해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러시아에 파병했다. 포탄과 미사일도 지원했다. 그 대가로 지금 북한은 푸틴의 대체할 수 없는 혈맹이 됐다.
러시아의 동맹이 됨으로써 북한은 체제 안전을 더 보장받게 됐다. 러시아는 지난해 4월 UN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 결의안을 거부했다. 북한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큰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다.
아울러 에너지와 식량을 지원해 북한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러시아 관광객들은 항공기를 타고 속속 북한 여행에 나서고 있다. 내년에는 북·러 두만강 국경에 자동차 도로도 개통될 예정이다. 시진핑이 지키지 못한 북한에 대한 약속을 푸틴은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
1990년 6월 4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 중이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역사적인 첫 한·소 정상회담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일성이 우리와의 대화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푸는 최상의 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라며 소련과의 정상회담 추진을 지시했다고 한다. 두 나라는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극비리에 회담을 준비했다. 자료사진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마체고라 주 북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 20일 인터뷰에서 미국과 한국이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러 동맹조약의 제 4조 군사적 개입 조항을 들먹이며 한·미 양국에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다시 협상에 나설 경우에도 러시아가 변수가 될 수 있다. 아예 트럼프와 김정은이 각각 푸틴과 사전 협의에 나설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푸틴은 한반도 문제의 조정자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는 더이상 과거의 러시아가 아니다. 물론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국은 북방외교의 길을 찾아 비밀리에 고르바초프와 접촉을 시도했던 1990년으로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강성웅 국제정치 칼럼니스트
- 전 YTN베이징 특파원, 해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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