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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검토도 없이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연관지은 국방부[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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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외교

    학계 검토도 없이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연관지은 국방부[영상]

    핵심요약

    국방부, 28일 3페이지 분량 입장문에서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연관지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는데, 역사학자들은 부정
    브리핑에서 '자유시 참변 가담' 말했다가, "질문 잘못 이해했다"며 말 바꿔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입증, 학문적 논의나 검토는 아니다"며 부실 시인
    "독립군 400-600명 사망, 500명 재판 회부,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 주장
    피해자 측 기록에 400-600명 사망 언급하지만, 대체로 과장됐다는 평가
    재판위원 참여에 대해서도 '공정한 판결 위해' 또는 '이용당했다' 의견
    재판 자체도 형식적…"극동비서부 책임자 잘못이기에 가혹하게 처벌 못해"
    전문가들에 제대로 검토도 안 받아놓고, '입장문'에 정당화 논리 담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국방부는 지난 28일 오후 3페이지 분량의 입장문을 내 홍범도 장군과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연관지으며,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역사적 측면에서 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고, 관련 분야 연구를 오랫동안 해 온 학자들도 국방부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고 있어 필요한 이유를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방부 스스로도 이 '입장문'에 실린 내용이 학문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학자들 연구와 달리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억지 연관지은 국방부




    국방부는 28일 저녁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글을 통해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며, "이로 인해 1921년 6월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현재까지 없으며, 역사학계에서도 그가 참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설이 주류다. 홍범도 부대는 참변 이전에 이미 무장해제를 했기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은 것까지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북대 사학과 윤상원 교수의 2017년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을 보면, 그는 1997년 나온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를 인용해 "자유시사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 연합뉴스전하규 국방부 대변인. 연합뉴스
    그런데 전하규 대변인은 29일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에 "자유시 참변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계에서 의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고, 또 여러 가지 문서에 따르면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서든지 그렇게 해서 작성한 이력서에 관련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해당 기자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자신이 가담했다는 내용을 소련에 말했다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말씀인가'라고 묻자, 전 대변인은 "그런 문서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다른 기자가 '(아까 한 답변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내용이 된다'고 항의하자 전 대변인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다"며 "만약에 그렇게 말씀드렸다면 제가 잘못 (말씀)드린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어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가담했다고 읽히게 만든 이 자료를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에는 "정책실, 관련 부서 등에서 받은 입장을 정리한 자료"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CBS노컷뉴스 취재진 질문에 이 '관련 부서'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입장문'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전 대변인 스스로도 "필요한 여러 가지 확인된 사실, 그것을 토대로 입장문을 정리해서 드린 것이니까 지금 역사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입증 또는 학문적인 어떤 논의, 검토 이런 것에서 드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국방부가 28일 낸 입장문은 그것 자체가 역사학계에서 치열한 토론과 검증을 거쳐 학술적으로 입증된, 의심의 여지가 적고 신뢰성 있는 자료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 된다.

    게다가 여기에 실린 내용이 과연 '확인된 사실'이 맞는지조차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자유시 참변은 어땠나?…홍범도 재판위원 참여는 사실, 다만 복잡한 앞뒤 상황

    역사 속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소련 극동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소련 적군이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의용군을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이는 독립군이 세력간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주된 해석이다.

    당시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토벌이 더욱 심해질 때였는데,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상당수 독립군 부대들이 1921년 1-3월 자유시에 모여 독립군 통합을 논의했다.

    통합 논의 초기에는 소련 공산당 극동국(局)이 지원한 대한의용군(상해파)이 통합 주도권을 쥐었지만, 1921년 4월 '극동지역 볼셰비키 혁명 사업'이 공산당에서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이르쿠츠크파)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통합 조건을 두고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1921년 6월 28일 더는 독립군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명목 등으로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국방부는 28일 낸 입장문에서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라며 "이 때 독립군 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홍범도 장군과 직접 관계는 없지만 사망자 집계부터가 문제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가해자 측의 기록을 보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한 인원은 36-37명 정도로 이야기한다. 피해자 측(대한의용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자유시에 있었던 부대 규모를 1500명이나 1800명, 적게 잡으면 1100명으로 잡기도 하는데 좀 지나친 부분도 있다"며 "포로로 잡혀서 강제 압송당한 사람이 800명 정도인데, 이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사망자로 잡아서 400-600명으로 계산한 것이다"고 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
    참변의 사망자 수는 기록마다 달라 현재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당시 대한의용군의 규모가 1천명 내외라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포로로 잡힌 인원이 864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사망자가 400-600명이라는 국방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참변 이후 포로들 가운데 300여명은 고려혁명군으로 재편성됐고, 죄질이 무겁다고 판단된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문제의 재판에서 홍범도 장군이 위원으로 참여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여기서도 전문가들의 견해가 국방부와 또 다르다.

    윤상원 교수는 논문에서 이인섭의 '홍범도 장군'을 인용해 "한인 빨치산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던 명망과 권위가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선임된 이유였을 것이다. 파쟁이 격심한 가운데 홍범도만큼 양측 모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며 "홍범도는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반면 반병률 교수는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가한 목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책임자 슈먀츠키에게 이용당한 쪽에 가깝다"며 "슈먀츠키는 자신이 독립군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홍범도 장군은 이런 앞뒤 사실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가해자 측이 무장해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명분 쌓기에 이용당했다"고 했다.

    물론 복잡한 당시 상황 특성상 두 가지 모두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재판의 진행이나 결과를 보면 국방부의 주장과 맥락이 다르다. 428명은 1년 이상의 강제노동, 중대범죄자로 분류된 72명(주로 장교)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돼 재판을 받았다.

    윤상원 교수의 논문에 인용된 고려혁명군 기관지 '붉은 군사'를 보면 11월 27-30일 동안 5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3명에게 징역 2년, 5명에게 징역 1년, 24명에게 1년 집행유예, 17명은 방면해 군대에 종사하게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반병률 교수는 "코민테른 측은 참변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해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밝히라고 명령했는데, 슈먀츠키의 책임으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는 점 등의 사실들이 드러났다"면서 "그래서 무장해제된 측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었다. 명분을 찾으려고 형식적으로 서둘러서 재판을 한 쪽에 가깝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민테른은 비슷한 시기에 낸 '11월 결정서'에서 피해자 측인 상해파(대한의용군)의 손을 들어 줬고, 자유시사변조사위원회를 설립해 진상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투옥된 약 80명 중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를 석방할 권한을 위원회에 위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윤상원 교수는 논문에서 "법원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시점이었고, 그래서 법원은 신속하게 판결을 내리고 법정다툼을 마무리했다"며 "때문에 반란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에도 불구하고 판결은 미약했다"고 적었다.

    게다가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고, 따라서 1920년대는 서구 열강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있을 때였다.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려면 소련과 손을 잡는 일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 홍범도 장군의 행보를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는데, 100년이 지난 2023년에 와서 갑자기 문제가 된 셈이다. 일본이 미국과 적대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등 시간이 더 지난 이후의 일이며, 이후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공언한 것은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다.

    결국 국방부는 스스로 인정했듯, 이 분야 전문가들에게 자문이나 검토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역사를 해석한 '입장문'을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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